칼치기 운전을 받아들이는 마음

[마흔이 서글퍼지지 않도록] 무슨 놈의 사정인지 모르지만 욕은 참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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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희한(raintouch)등록 2020.12.22 16:38
끼익!!
급제동으로 인해 여섯 식구가 동요에 맞춰 헤드뱅잉을 했다. 갑작스러운 칼치기. 시내에 볼일이 있어 나가는 길이었고 그리 복잡하지 않은 시간대였다. 여유 있는 다른 차들에 비해 급해 보이는, 정확히는 뭔가 안달복달하는 듯한 차가 2차선 도로를 영화처럼 치고 나갔다. 그리 예쁘지 않은 입에서 그와 어울리는 말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집어삼켰다.

나를 대신해 아내가 분노했다.
 "어머, 저 사람 뭐야! 위험하게!"
애걔... 예쁜 입이라고 거친 말이 저 정도다. 그래도 내 적의감을 100분의 1쯤 표현해준 아내 덕분에 속이 조금은 시원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러게... 뭐. 급한 일이 있나 보지. 뭐..."
나도 모르게 대인배 멘트가 나왔다. 어라? 스스로도 놀란 멘트에 없던 너그러움이 생겨난 것 같다. 정말 아내의 최선을 다한 거친 말 덕분일까. 아니면 나도 몰랐던 본디 착한 나의 본성 덕분일까.

 

저도 제가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민망해 하며 거리에 나부끼는 광고 풍선 처럼 필사적으로 흐느적 거릴 줄은... 죄송합니다. ⓒ 남희한

 
겪어보면 알 수 있다.

결혼 전의 일이다. 주말이면 서울로 아내를 만나러 다녔다. 금요일 퇴근 후 버스를 타면 10시가 넘어 남부 터미널에 도착하는데, 4시간 반이라는 시간을 고속도로에 쏟고 미아사거리까지 지하철 여행을 하면 11시가 훌쩍 넘었다. 지루하고 고된 여정이었다. 

그러다 3시간 만에 서울역 입성이 가능하다는 S형의 최적 코스를 함께 했다. 칼 퇴근 후 자가용으로 대전까지 내달려서 예매해둔 입석 KTX를 타고 서울 중심가로 직행하는 최단거리 루트였다. 예정대로 대전에 도착하면 10분 남짓 만에 표를 끊고 기차에 올라야 하는, 1분 1초를 그야말로 금쪽같은 시간으로 만들고 마는 코스. 그 한 번의 경험으로 나는 칼치기 운전자를 욕할 수 없게 됐다.

퇴근 종이 울리자마자 S형과 함께 차로 달렸다. 헐레벌떡 차에 오르자마자 시동이 걸렸고 S형의 눈빛이 변했다. 그리고 무한질주가 시작됐다. 이쪽저쪽 빠르게 치고 빠질 때면 주위의 환대가 이어졌다. 끝없는 크락션의 향연. 고속도로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내비게이션의 도착시간엔 교통상황이 반영되지 않았기에 최소한 상한 속도로 달려야만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소 천천히 가자던 돌림 노래를 쏟아내던 내 입은 굳게 닫혔다. 시간에 쫓겨서인지 이리저리 빠져나갈 공간까지 눈에 쏙쏙 들어왔다. 오. 아드레날린 효과인가. 마치 영화같이 주변 교통상황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경로가 그려졌다. S형에게도 같은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있는지 내가 보고 있던 경로를 그대로 나아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당사자에겐 닿지도 않을 말을 차에다 연신 뱉어내며 고속도로를 빠져나왔다. 도착 예정 시간을 사수했다는 안도감에 긴장을 늦추려는데, 눈앞에 붉은 등의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조금만 더 가면 대전역인데 무슨 놀이라도 하는 듯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온갖 크락션 항의와 눈대질을 받으며 왔는데, 그리 크지도 않은 양심을 버리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뛰어도 5분 거리를 나아가지 못했다. 그렇게 달려온 형의 노고를 생각하니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나라도 내려서 달려야 하나?', '이제 형의 쌍욕과 삿대질을 받으며 형을 버려야 하는 건가?', '내 행복을 빌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빵빵~"
거친 크락션 소리에 잠시의 망상에서 깨어나 보니, 형이 속칭 '머리 밀어 넣기'를 하고 있었다. 얼굴은 상기된 채 빵빵거림을 애써 무시하며 빈 공간과 시간만 번갈아 보며 말했다. "걱정 마! 갈 수 있어!". 그 순간 나는, 잠시 흔들렸던 나를 반성하며 이 사람과 함께하기로 마음을 다 잡았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팔을 뻗었다. 경박한 손사래로 공간을 만들고 빵빵거림에 연신 감사함과 미안함을 표시했다. 말할 수 없이 민망했다. 하지만 이미 민망함은 절박함에 멱살 잡혀 있었다.

지난 과오가 내게 남긴 것

상체 반이 차 밖에서 풍선 춤을 추었던 그때, 앞으론 절대! Never! Ever! 칼치기와 머리 밀어 넣기 하는 사람들을 욕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비록 그 행위들이 용납될 만한 것은 아니나, 그들도 어쩌면 급한 사정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하게 됐다. 별 것도 없는 목적의 과속 운전에 내심 응원을 보내고 머리 밀어 넣기에 동참하면서 사람은 늘 환경에 영향을 받기 마련임을 새삼 깨달았다. 살면서 겪은 수많은 불합리함을 스스로가 하게 될 때, 시각은 180도 변한다. 어쩔 수 없다는 핑계든 이게 최선이라는 절심함이든 당시의 상황이 나를 잡고 흔든다.

정확히 5분을 남겨두고 도착한 우리는 소란을 떨며 표를 끊어 기차에 올랐다. 이내 출발하는 열차. 이만한 스릴이 또 없다. 커진 동공과 땀범벅이 된 우리 몰골이 그때야 눈에 들어왔다. 단 한 시간 남짓에 우린 많이 늙어 있었다. 웃으며 고생했다고 서로를 토닥였지만 못내 씁쓸했던 표정. 엄청난 압박감에서 벗어난 작은 성취감 뒤엔 수없이 흔들렸던 울렁거림과 여전히 귓전에 울리는 듯한 크락션 환청이 찾아왔다.

수많은 원성과 여유 없음을 자초하고 얻은 것이라곤 조금 이른 술자리였다. 당시엔 시간을 금쪽같이 여기며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위로했지만 그런 부질없음이 또 있을까. 그래도 한 가지 크게 얻은 것이 있다면, 남의 사정을 조금은 염두하게 됐다는 것. 뭔가 사정이 있겠지. 이유가 있겠지. 비록 그 이유가 그냥이라고 해도, 그 사람도 알 수 없는 기분이나 생체반응 때문일 수도 있겠거니 하고 넘길 수 있는 일말의 여유가 생겼다.

사정이 있겠지

칼치기를 용인하거나 옹호할 생각은 1도 없다. 그저 내 마음을 위해서다.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가끔 그 (놈의) 사정이 무엇인지 무척이나 궁금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굳이 신경을 쓰지 않음으로 해서 에너지 소모를 줄인다. 이해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여러모로 편하다. 그 사람도 모를 수 있는 이유를 헤아릴 방법도 없거니와 이유를 안다고 이해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어서다.

그래서 그냥 넘긴다. 다양한 경험 속에서 삶의 관점이 다양해진다더니, 오래전 나의 과오가 나름 유용한 관점 하나를 달아줬다. 한 없이 쭈그러들었던 지난날의 나 덕분에 오늘의 내가 조금이나마 빛을 발했다.

차 안에서 화를 내고 욕을 읊조렸다면 그 모든 것을 보고 듣는 것은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었을 터. 밑지는 장사를 하지 않아 다행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저 대인배처럼 허허거리고 말 것이다. 차 간격을 더 넓히고 2차선에 붙어 있을 것이다. 

초조한 범님들 편히들 지나가시구려~ 조금 여유 있는 이 범님은 큰길을 가겠나이다~ 그리고 웬만하면 나를 위해서든 남을 위해서든 함께 큰길을 가봅시다. 그 일깨움을 위한 이 빵빵거림에 조금은 움츠려 들길 바라며... 빵빵~~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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