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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특급' 박찬호의 은사 토미 라소다 별세

푸른 피의 전설 토미 라소다와 한국야구의 인연

21.01.09 12:29최종업데이트21.01.09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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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 라소다 ⓒ 위키백과

 
'코리안 특급' 박찬호의 은사이자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의 전설인 토미 라소다 전 로스앤젤레스(LA) 다저스 감독이 별세했다. 향년 93세. 다저스 구단은 8일 성명을 내고 라소다 전 감독이 캘리포니아주 풀러턴 자택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병원으로 긴급 이송됐으나 사망 선고를 받았다고 발표했다.

AP통신 등 현지 언론들도 라소다 전 감독의 소식을 일제히 비중있게 보도했다. 라소다 전 감독은 지난해 11월 약 두 달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불과 이틀 전만 해도 상태가 호전됐다며 퇴원 소식을 알렸기에 야구팬들에게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1927년생으로 이탈리아계 미국인인 라소다 감독은 미국프로야구와 LA 다저스의 역사를 논하는데 있어서 결코 빼놓을수 없는 인물이다. 현역 시절에는 다저스의 전신인 브루클린 다저스와 캔자스시티 애슬래틱스(현 오클랜드)에서 투수로 활약했지만 커리어의 대부분을 마이너리그에서 보냈고 메이저리그에서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통산 성적이 4패, 평균자책점 6.48에 그친 철저한 무명 선수에 불과했다. 은퇴후에는 이후 다저스의 스카우트와 마이너리그 코치를 거쳐 1973년에는 메이저리그 코치로 합류했고, 1976년에는 월터 앨스턴 감독이 은퇴하자 그 뒤를 이어 감독으로 부임하며서 본격적으로 감독 라소다의 전설이 시작됐다.

이후 라소다 감독은 지도자로서 다저스와 메이저리그 역사에 엄청난 업적을 일궈냈다. 다저스에서만 무려 20년을 집권하면서 통산 1,599승, 승률 .526을 기록했다. 포스트시즌 무대에 7번 진출했고, 이 중 1981년과 1988년, 두 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다저스는 지난 2020년에야 다시 정상에 오르기전까지 라소다 시대 이후 무려 31년간이나 무관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메이저리그판 김응용'이라고 할만한 라소다 감독의 진가는 장기집권 속에서도 큰 암흑기나 슬럼프없이 꾸준히 강한 팀을 구축했다는 점이다. 당시 다저스는 빅마켓 라이벌인 뉴욕 양키스같은 구단과는 달리, FA 등 고액을 들여 외부 영입보다 유망주 육성을 더 중시했던 구단이었고, 라소다 감독도 이에 맞춰 신인급 선수들을 과감하게 중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성적을 이끌어냈다. 미국뿐 아니라 중남미-아시아 등 해외야구 시장 개척에 눈을 돌려서 다저스 선수단이 메이저리그에서도 대표적인 '다국적 군단'의 반열에 오른 것은 라소다 시대부터였다.

라소다 감독의 재임 말년인 1990년대 초중반은 팀성적만 놓고보면 다저스의 침체기였다.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고 포스트시즌 진출조차 실패한 시즌이 많았다. 하지만 암흑기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 90년대의 다저스 역시 99패를 기록했던 1992년을 제외하면 매년 꾸준히 5할 이상의 승률을 기록하며 가을야구 진출을 다투던 강팀이었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와일드카드가 없고 오로지 지구우승만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던 시기라 포스트 시즌 진출이 더 어려웠던 시절이었고, 유독 경쟁이 치열했던 내셔널리그 서부리그에서 높은 승률에도 근소한 격차로 아깝게 PO에 탈락한 경우도 많았다. 주어진 선수구성으로 최상의 전력을 이끌어내는데 탁월한 라소다 감독의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결과다.

또한 다저스는 라소다 감독의 재임 마지막 5년간(1992-96) 연속으로 내셔널리그 신인왕(에릭 캐로스, 마이크 피아자, 라울 몬데시, 노모 히데오, 토드 홀랜스워스)을 배출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며 다저스 육성 시스템의 진수를 증명했다.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인 박찬호를 발굴하고 키워낸 것도 바로 이 시절이었다.

라소다 감독은 한국 팬들에게도 '박찬호의 미국 양아버지'라는 이미지를 통하여 친숙해졌다.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첫 감독이기도 했던 라소다 감독은 당시만 해도 미국야구계에서는 미지의 세상이나 마찬가지였던 낯선 한국에서 건너온 무명의 어린 투수를 따뜻하게 대해줬고, 그의 성장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드러냈다. 라소다 감독은 한국인 특유의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박찬호의 성실한 인품과 프로의식에 첫 인상부터 큰 호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94년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박찬호는 2년간의 눈물겨운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쳐 1996년부터 마침내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자리매김했다. 라소다 감독은 1996년 심장병으로 인하여 시즌 도중 사임하면서 감독직에서도 은퇴했고, 박찬호의 기량이 본격적으로 만개하는 순간을 직접 함께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다저스 구단 운영진으로 활동하며 박찬호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야구인생 내내 가장 중요한 후원자로 남았다.

라소다 감독은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올릴때마다 인터뷰에 종종 등장하여 "찬호는 언제든 20승 투수도 될수 있다." "그의 성장을 의심한 적이 없다. 우리(다저스)가 오히려 찬호를 느리게 키운 것"이라며 덕담을 아끼지 않는 모습으로 한국 팬들에게도 호감을 샀다. 박찬호 역시 현역 생활을 은퇴한 이후에도 고민이 있을때마다 라소다 감독에게 자문을 구하거나 꾸준히 연락하고 모임을 갖는 등 끈끈한 인연을 이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박찬호는 97년부터 다저스에서 5년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정상급 에이스로 성장했고, 아시아 투수 최다승인 124승을 남기고 은퇴하는 등, 결국 라소다 감독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성과로서 증명했다. 다저스는 박찬호를 시작으로 2000년대 에는 최희섭-서재응 등을 영입하기도 했으며, 국민타자 이승엽의 영입을 추진하다가 아쉽게 무산되기도 했다. 2010년대에는 류현진이라는 또다른 대형투수를 영입하여 맹활약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한국 선수들과 가장 끈끈한 인연을 지닌 구단이라는 이미지를 쌓았다.

라소다 감독은 호방하고 유쾌한 성품에 유머감각도 대단히 뛰어난 인물로 유명했다. 박찬호와의 일화에서도 보듯이 개방적인 성격으로 나이차이가 많이나는 어린 선수들이나 다양한 개성을 지닌 선수들을 끌어안는 포용력이 탁월했다. 올스타전같은 무대에서 평소에 인연이 없던 타팀의 스타플레이어나 '악동'으로 불리던 선수들과도 스스럼없이 장난을 치면서 친목을 주고받는 장면은, 미국야구계에서 라소다 감독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유명한 장면들이다.

한편으로는 이탈리아계답게 다혈질적인 성격과 수다스러운 기질 때문에 사건사고도 많이 일으켰다. 1977년 월드시리즈에서는 방송국과 인터뷰 이후 마이크를 떼는 것을 잊어버리고 덕아웃에서 같은 팀 선수와 얼굴을 붉혀가며 말싸움을 벌이는 소리가 미국 전역에 생중계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또한 시카고 컵스와의 정규시즌 경기에서 대패하고 난후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열받은 라소다 감독이 마치 젊은 래퍼의 디스랩을 연상시키는 현란한 욕설을 무려 2분여간 날리며 졸전의 분노를 가감없이 표현했던 장면도 유명하다. 화가 나면 심판과 싸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기로도 악명이 높았다. 한창 혈기왕성하던 지도자 시절에는 수다스럽다는 의미에서 '떠벌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라소다 감독은 성공한 야구인이면서도 본인부터가 지독한 야구광으로도 유명했다. 다저스의 상징색이라고 할 수 있는 푸른 색을 빗대어 "내 몸에는 푸른 피가 흐른다.(I bleed Dodger Blue)"면서 구단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일년중 가장 슬픈 날은 야구가 끝나는 날이다.""내가 가장 기쁠 때는 게임에서 이겼을 때이고, 두번째로 기쁠 때는 게임에서 졌을 때다,"같은 어록들도 유명하다. 라소다 감독의 야구에 대한 순수하고 깊은 애정을 보여주며 골수 야구팬들의 공감을 자아낸 대목이다.

라소다 감독은 다저스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구단 부사장-단장-특별고문 등을 역임하여 다저스에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1997년에는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미국 대표팀을 지휘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어쩌면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지켜본 야구가 된 지난 2020년에는 친정팀 다저스가 오랜 한을 풀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는 모습도 지켜볼수 있었다. 그야말로 레전드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누구보다 후회없이 도전했고 모든 것을 이뤄낸 축복받은 야구인생이라고 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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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라소다 박찬호 다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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