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보통학교 초기 졸업식 사진 - 위에서부터 사립부산진육영학교 여자부 제1회 졸업식(1911), 부산진공립보통학교 제1회 졸업식(1912), 제2회 졸업식(1913) 사진이다. 1회에 최천택, 2회에 백용수?양성봉?김영주가 있지만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다
부산진초등학교 제공
동화정책을 일제가 실시하다
사립학교는 개화와 구국을 목적으로 설립 운영되었고, 더우기 통감부 시대에는 교육구국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므로, 사립학교는 민족운동의 온상지로 되었다. 따라서 통감부는 사립학교 탄압을 목적으로 사립학교령을 공포하였다.
1908년 8월에 공포된 「사립학교령」은 사립학교의 민족교육 말살정책을 위해 제정된 것이다. 사립학교는 재정적 기반과 학교시설이 빈약하였다. 검정 교과서의 사용으로 애국교육을 실시할 수 없게 되어 사립학교 교육은 위기에 봉착했다. 통감부는 애국적인 도서 51종 2천여 권을 사용금지시켜 불살라 버렸다. 학부에서 편찬한 창가집에는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의 것이나 항일적인 것이 한 편도 수록되지 않아, 창가를 통한 애국심 고취는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강제 병합 후 일본은 조선에 동화(同化)정책을 실시했다. 동화란 동일화되는 것으로 서로 동등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조선을 일본화시키는 것이다. 일본은 문명국이자 세계적 강국이 되었다. 힘없고 가난하고 당파 싸움으로 독립이 불가능하고 발전의 기미도 없는 조선을 일본처럼 문명화하는 것이 동화정책의 목표였다. 하지만 일제는 조선을 늘 열등민족으로 대하며 차별했다. 그들의 동화정책은 차별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나아가 조선민족말살 정책을 펼쳐 일본 천황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기르고자 하였다. 그들은 사상, 언론, 종교, 교육 등의 통제와 무단통치를 통해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
1911년 일제는 종래의 「사립학교령」을 개정하여 「사립학교규칙」을 공포함으로써 사학의 탄압을 일층 강화하였다. 그 내용은 학교설립의 인가 규정을 더욱 엄격하게 하고 교과서 검열을 강화하며, 일어교육과 보급에 치중하여 그들의 황국신민화정책을 확고히 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학억압정책은 1915년 「개정사학규칙」에서 더욱 심화하였다.
「조선교육령(1911)」은 "… 충량한 (일본의)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로 … 보통교육은 … (일본) 국민다운 성격을 함양하고 (일본) 국어를 보급하는 것을 목적으로…"하고 있다. 민족의식의 말살과 황민화 동화 교육을 통해 식민통치에 적합한 인간 양육을 시도하였다. 일제는 고등교육보다는 초등교육과 실업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일본인의 초중등 교육 기간이 11년인데 비해 한국인은 7~8년으로 짧았다. 낮은 수준의 교육과 차별 교육이었다. 대학교육은 제공하지 않았다.
1910년대 초의 부산진공립보통학교의 학적부를 보면, 부모의 직업은 농업과 상업이 많았고, 입학 전 남학생들이 다닌 학교는 한문제(漢文霽, 수정동), 학해제(學海霽, 좌천동), 죽림제(竹林霽, 좌1동), 관필제(觀必霽, 좌1동), 좌천학교, 수정제(水晶霽, 수정동), 구명학교(구포), 육영제(育英霽, 범1동) 등이었다. 여학생은 일신학교 출신이 많았다. 배운 과목은 수신, 국어(일본어), 한문 및 조선어, 산술, 이과(3~4년), 도화, 체조, 창가(2~4학년), 농업(4학년) 등을 배웠다. 사립보통학교보다 공립보통학교 시절의 학생 졸업수가 많은 것은 그만큼 교육에 대한 열의와 교육 공간이 넓어졌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수신(修身)과목은 한국인 학생에게 일본식 사고와 태도 등을 주입하려는 의도에서 개설한 과목이다. 일본에 대한 책무와 일본식 예법, 관습을 배움으로 일본식 사고와 행동을 하는 식민지 백성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일본어는 '국어'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한국어는 '제2외국어'가 되었다. '모국어' 일본어는 일본 신민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서 그리고 일제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한 언어 소통 수단이었기에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다. 일본어가 출세의 수단임은 누구나 알았다. 그래서 한국인이 세운 개성학교를 개성일어학교로 바꾸기까지 한 것이다. 일본인이 한국어를 배우기보다 한국인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것이 개항 이후부터 식민지 지배에 중요함을 알고 있었다. 한편 일본어는 생업 수단인 동시에 새로운 문명 사조를 배우기 위한 수단이었기에 필수적인 과목이었다.
4년제 보통학교의 주당 26∼27시간 중 일어를 10시간씩 배당함으로써 수업 총시간의 38%나 차지하게 하였다. 이에 반해 국어 및 한문은 주당 6시간에 불과하였다. 이렇듯 한국의 학생들은 보통학교 1학년 때부터 외국어를 학습해야 하는 과중한 부담을 지게 되었으며, 국어 및 한문을 합하게 되면 총수업 시간의 61%를 언어와 문자 학습에 충당하였으니, 이로써 다른 교과 학습이 얼마나 희생되었나를 짐작할 수 있다.
한국어를 가르친 이유는 일본인 교사가 한국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며 아동을 훈육하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일본어를 가르치기 위해 한국어 및 한문을 허용한 것이다. 그에 따라 언문 철자법도 제정하였다. 한국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지배를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한국인은 한문 없이 의사소통할 수 없었기에 당시 부모들은 아동을 보통학교 입학 전에 서당에 보내 한문을 익히게 하였다. 또 보통학교가 일본인으로 만드는 교육이기에 보통학교 대신에 서당에 보내기도 했다. 실재 1911년 1654개의 서당이 1916년에는 25,486개로 1만여 개가 더 증가되었고, 학생수도 141,604명에서 259,531명으로 증가하였다. 식민지화 교육을 하여도 조선인의 민족의식 자체를 죽일 수는 없었다.
정공단 아이들, 보통학교를 졸업하다
보통학교의 교원은 훈도와 부훈도라 하였는데, 뒤에 촉탁 교원, 대용 교원도 있었다. 통감부 시대까지는 학교장이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하지만 강제 병합 이후 일본인 교장이 독점하고 교감은 없애고 일본인 교사는 일본 본토에서 채용하여 1~3개월의 강습 후 임지에 배치하였고, 한국인은 관립의 고등 보통학교와 여자 고등 보통학교의 사범과 출신, 그리고 경성고등보통학교의 임시 교원 양성소 출신 및 교원 시험 합격자를 채용하였다.
박재혁이 다니던 시절의 교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지만, 1912년 당시 교사로는 훈도(訓導)는 김용세(金容世, 부훈도 1911~1916), 이홍로(李弘魯, 부훈도 1911~1?), 김응규(金應圭, 부훈도 1911~?), 송석무(宋錫武, 부훈도 1912~1913) , 최봉우(崔鳳友, 부훈도 1912~1917),등이 있었다. 대용 교원(代用敎員)은 최진학(崔進鶴, 1911~1912), 평전후쿠(平田フク, 1911~1915)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주목할 사람은 김용세 선생(1873~?)이다. 그는 대한협회 평의원, 동아개진교육회 총무, 부산진청년학회 회장, 부산진양정부인회 감독을 지냈다. 부산진보통학교 교사로 1911년부터 16년까지 근무를 하였다.

▲부산 동래 학교 현황(1910) -1910년 당시 부산 동래지역의 한국인이 다녔던 공?사립학교의 현황을 알 수 있다. 공립 3개교, 사립 15개교 였다.
출처 : 慶南日報(1910.11.02.)
을사늑약 이후 식민지화의 위기의식에 많은 개화 지식인들은 근대 교육을 추진한다. 국권회복이 의병과 같은 무장투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실력양성을 우선해야 한다고 보았다. 실력양성이 이루어질 때까지 일본의 한국 지배는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받아들였다. 대한협회(大韓協會)는 1907년 11월에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조직되어, 교육의 보급·산업의 개발·민권의 보장·행정의 개선 등을 강령으로 내걸고 대한자강회와 유사한 형태의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했으며, 전국에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하고 수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여 회세를 확장해 갔다. 대한자강회는 부산, 동래 2개소와 대한협회는 동래 1개소의 지회를 설립인가 하였다. 동아개진교육회(東亞開進敎育會)는 1905년 3월에 교육과 식산흥업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이다.
김병세는 당시 부산지역의 교육 운동에 열성적인 인물로 청년과 부인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애국, 민족, 국력을 강조하였다. 당시 사회진화론이 팽배하던 시절이라 약육강식 적자생존에서 벗어나는 문명개화는 실력양성에 있다고 보았다. 김병세는 학동들에게 신채호가 지은 『을지문덕전』과 『이순신전』 등의 위인전과 역사책 읽기를 권유하였을 것이다.
부산육영학교는 1911년 2월 1일 '부산진보통학교'라 이름하였다. 당시 5학급 규모로 아동은 162명이었다. 1911년 3월 25일 제2회 '사립부산진보통학교' 졸업식을 거행한다. 졸업생은 남학생 11명, 여학생 12명으로 총 23명이다. 여학생은 대부분 일신(日新)학교 출신이었다. 박재혁은 사립부산진보통학교 제2회 졸업생이지만, 졸업생 명부가 현재 부산진초등학교에 없다. 아마 그의 친구 김인태도 이 당시 졸업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확인할 수 없다.
박재혁의 학교 기록은 부산진보통학교에도 없지만, 부산상업학교 학적부도 인적 사항 이외에는 어떤 기록도 없다. 화재로 망실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학교 기록은 흔적이 없다. 박재혁은 보통학교를 졸업을 하였지만 기울어진 가정 형편과 부친의 3년상이 끝나지 않아 진학을 하지 않았다. 1년 동안 박재혁은 집에 머물며 책을 읽고 박명진을 돌보며 소일했다. 때론 막노동이나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거나 또는 상점 점원으로 단기간 일했을 가능성이 있다.
1911년 4월 '사립부산진(육영)보통학교'는 공립으로 이관되어 사립좌천학교를 흡수 통합한다. 그리고 1911년 5월 3일 '공립부산진보통학교'라 칭하고 개교하였다. 교장은 일본인 소조암태(穌鳥岩態)이고 5학급 162명이며, 4년제였다. 사립을 공립으로 바꾼 것은 한국인의 자주적인 학교를 없애고 민족 사상을 말살하려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1911년 11월 '부산진공립보통학교'로 다시 교명을 바꾼다.
1912년 3월 23일 제1회 부산진공립보통학교의 졸업식이 있었다. 남학생 13명, 여학생 15명으로 통 28명이다.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많았던 남녀공학이었다. 최천택은 졸업식 때 정근상을 받았다. 4학년 2학기 정근상의 상품은 연필 1본(本), 백지 10장이었다. 졸업 1년 정근상 상품은 잡기장 1책이었다. 다음 해 3월 24일 제2회 졸업식이 있었다. 남학생 20명, 여학생 23명이었다. 백용수(부산진공보 1917~19 촉탁, 해방 후 박재혁 비석 세움), 양성봉(전 부산시장), 장지형(張志亨, 구세단, 장건상 조카), 김영주(부산경찰서 투탄) 등이 2회 졸업생이다.
부산진공립보통학교는 좌천동에서 개교하여 1913년 현 정공단 오른쪽에 부지 191.734㎡[58평]를 확장하였고, 이어 912.4㎡[276평]를 매수하여 여자부를 이전 통합하였으나 교지가 협소하여 1922년 11월에 현재의 범일동 부산진초등학교 자리로 신축 이전하였다
부산진초등학교, 항일 운동에 앞장서다
부산진초등학교 출신 중에서 항일 운동을 한 사람으로는 의열단원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관련자인 최천택(1회), 김영주(2회)가 있다. 3·1 만세운동 관련으로 김귀룡(1898~1975)이 있다. 그는 1919년 동래고 재학 중 3월 13일 동래 장날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최익수(崔益守, 1901~1978), 1919년 3월 부산 좌천동에서 박성해·김태곤 등과 동래고등보통학교의 학생에게 독립선언서를 내주며 시위를 선동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3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학생운동관련자로는 시인이 박영포(朴永浦, 1913~1939)가 있다. 그는 1927년 부산 제2 상업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사건 주모자로 체포되어 이듬해 폐결핵으로 임시출옥했다. 그 후 부산진육영학원(釜山鎭育英學院) 강사로 봉직하고, 1935년 유치환 등과 함께 동인지 『생리(生理)』를 발간했다. 같은 해 일본 『문예춘추』에 시 <푸른 조끼>가 당선되어 데뷔했다. 그는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친구였던 김성태 역시 1929년 부산상업학교 2학년 때 광주학생항일운동 주모자로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광우(李光雨, 1925~?)는 1942년 5월 17세의 나이로 일본군 군수품 제조공장인 조선방직을 폭파할 목적으로 친우회 조직. 공장 노동자를 상대로 선동을 하고 자갈치 시장 등을 돌며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담은 전단을 살포하다 이듬해인 1943년 3월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단기 1년 장기 3년을 받고 1년 5월 20일 동안 옥고를 치렀다.
정오연(鄭五然, 1928~1945)은 1943년 만주에서 귀국한 차병곤이 동창인 박정오, 신정호 등과 조직한 독서회에 참여하였다. 이후 동지 규합에 노력하여 1944년 5월 1일 순국당(殉國黨)을 결성하고 강령은 '민족독립·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한다'라고 정하고, 행동 목표를 총독암살, 군사시설 파괴, 일인 집단 거주지 방화 등을 결의하였다. 이는 단순한 학생운동조직이 아니라 독립군적 조직으로 전환해 갔던 면모를 보여준다. 당시 17세로 부산공업학교 2학년에 다니던 그는 폭약연구책을 맡아 활동하며, 차병곤 등과 함께 부산 시내 영도다리에 '대한독립 만세'라고 쓴 벽보를 붙이는 등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서기도 했다. 국내에서 무력투쟁 전개가 여의치 않아 만주에 가서 독립군에 가입키로 하고 출발하던 중 체포되어 고문으로 1945년 5월 9일 옥중 순국하였다. 그의 생가터가 최천택의 집 주소가 같다.
또 양산보통학교에 다니다가 2학년 때 부산진공보로 전학을 와서 3학년을 다니고 다시 양산공보에서 졸업(3회)한 서상건(徐尙鍵, 1899~1960)이 있었다. 그는 1915년 양산공보를 졸업한 후 1919년 3·1운동 직후 경성에서 『혁신공보』를 발행하던 통도사 스님 출신인 박민오(朴玟悟)의 권유로 대동단에 가입하였다. 서상건은 대동단으로부터 제2차 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하라는 밀지를 받고 진주·하동 지역에서 활동하던 중에 양산의 김덕봉(金德峰)·김봉길(金鳳吉) 등과 함께 1921년 5월 12일 진주경찰서에 체포되었다.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원에서 기소유예 처분으로 풀려났다. 그 후 양산청년회, 신간회 활동을 하였다. 그의 아들 서장주(徐璋珠, 1921~1989)는 1942년 일본 동경고등공업학교 재학 중 노무자를 가장하여 일제 군수시설파괴를 도모하다가 1943년 체포되어 2년 형의 옥고를 치렀다.
학생들도 당시의 시대 상황에 저항하며 동맹휴학 운동을 하였다. 1931년 2월 23일 부산진공보 6학년 급장 이순기(李順基)는 9시 조회 시간에 교단에 등단하여 약 1천여 명의 학생에게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동맹휴교를 결행하고 우리들의 요건이 12개 조를 관철하기 위하여 시위 운동을 전개하자."라고 절규하고 동맹휴교를 책동하고 전단 100여 매를 뿌렸다.

▲부산진공보생 동맹휴교 -부산진공보학생들이 수업료 체납에 따른 퇴학과 정학으로 맹휴, 수업료 감하(減下) 문제로 동맹휴교를 주도하였다.
출처: 조선일보(1931.02.26.)
출동한 경찰은 6학년 이순기, 김영건, 양명수 외 1명과 동래고보 1학년 이연근 외 2명, 총 7명을 검거하여 철야 심문하였다.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수업료 철폐, 학용품 무상대여, 교원 간 풍기 행위 각성, 교수방침 개선 등이었다. 1925년 부산진 고학생 상조회에 가입한 부산진공보학생들은 겨울 모진 바람 찬 이슬을 무릅쓰고 밤이 이슥하여 만물은 고요히 잠들었을 때 처량한 나어린 목소리로 "고학생 빵이요."하고 외치며 팔러 다녔다. 그만큼 경제적으로 학교 다니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 학생들의 학적부가 현재 부산진초등학교에 보이지 않는다.
1931년 1월부터 3월까지 약 3개월 동안 전국 각지에서 맹휴(盟休) 사건이 있었다. 수업료 체납에 따른 퇴학과 정학으로 맹휴, 수업료 감하(減下) 문제로 맹휴 등이 벌어졌다. 학교 수는 중등학교가 7개, 보통학교가 8개소로 총 15개교가 맹휴 혹은 동요에 참여하였는데 학생 수효는 약 1,950여 명에 이르렀다. 동맹휴학의 요구의 8할이 '수업료 감하'였다. 작년에도 이와 같은 맹휴가 있었으니 경제적 문제가 심각하였다. 그런데 부산진공보 학생 집을 수색한 결과 '제3인터네셔널 규약'과 '피오뉠' 규약 외 사회주의에 관한 다수의 '팜플릿'을 압수하였다. 당시 사회주의 사상이 만연했음을 알 수 있다.
1933년 12월 "조선(朝鮮) 사상(思想) 운동사(運動史) 초유(初有)의 초등교원대적화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호외를 뿌릴 정도로 대단한 사건이었다. 부산진공보의 교사 최명석(崔命錫, 1913~1968)이 경남적색노동조합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다. 10명이 예심 회부와 동시에 휴직 처분을 당했다. 1934년 4월 신문보도에 따르며, 1933년 3월 조선에서 처음으로 초등교육 적화 공작과 노동자화 공작을 실시하기 위해 공립보통학교 훈도 김두영(金斗榮) 등 9개군 공립보통학교 훈도 13명, 전협(全協)의 김차룡을 비롯한 22명이 '경남적색교육노동자협의회'를 조직하였다.
조직은 언론(言論)·집회(集會)·출판(出版)·결사(結社)의 자유 획득, 제국주의(帝國主義) 교육 타도, 조선인 본위의 교육 실시 등을 목적으로 한다고 정했다. 또한 이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강령으로, 조선인과 일본인의 월급차별 철폐, 의무교육제도 실시, 반전사상(反戰思想) 고취, 교내 일본어(日本語)화 반대 등 35항 안을 정하고 학기 말 휴가를 이용하여 마산(馬山)에서 회합하여 결사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 부산진공보 훈도 최명석은 1934년 7월 5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보안법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경남적색교육노동자협의회 당시 신문 호외에 관련자 인물 얼굴을 지우고 보도하여 보도검열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호외(1933.12.12.)
경남적색교육노동조합사건의 주요 여자운동가인 박보호, 조금순(趙今順), 김말수(金末守), 신현숙(辛玄淑), 김숙향(金淑香) 등은 부산 각 고무공장에 산업별 노동조합의 조직사명을 띠고 각 고무공장에 직공으로 들어가 환대고무공장 파업사건에서부터 각 공장의 파업사건을 지도하였다.
일제강점기 이름을 남긴 사람도 있지만 이름을 남기지 않은 항일운동가와 마찬가지로 친일 부왜인들이 있고, 또한 그 삶의 곡절도 있음이 분명하다. 부산진보통학교 출신 중으로 해방 이후 그 이름이 두드러진 사람은 부산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윤인구, 부산일보와 부일장학회를 설립했던 김지태이다.
나라는 망해도 청년들이 배움 속에서 독립운동의 열기를 끊을 수는 없었다. 경술국치(國恥)는 단순히 나라의 수치가 아니라 민족 문화 역사의 말살로 이어지기에 이 날을 목놓아 통곡해야 한다. 망국은 와도 힘을 길러야 하고 힘은 글과 총에서 비롯됨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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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찰서 투탄 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 친구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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