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일보 창간호 김홍조가 발행한 경남일보는 1909년 10월 15일에 창간된 대한민국 최초이자 가장 역사가 오래된 지방신문이다. 식민지 초기에 발행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외에는 유일한 일간신문이었다.
이병길
1904년 러일전쟁은 군국주의 일본의 침략야욕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되자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민중의 의식을 개선하고 근대적 가치를 주입하며 계몽운동가들의 주장을 전달하기 위하여 김홍조는 경남 진주에서 『경남일보(慶南日報)』를 발행하였다. 경남일보는 대한제국 말기 지방에서 조선인에 의해 1909년 10월 창간되어 1915년 1월 경영난으로 폐간(887호)될 때까지 조선인이 경영했던 유일한 지방 민간인 신문이었다.
1909년 2월 신문발행 계획과 함께 "어둡고 어리석은 국민의 지식을 향상시키기 위해 신문 발간에 뜻을 모았고, 장차 경남의 교육과 실업발전을 도모하고자"하는 발기문을 내고, 6월에 제호는 『경남일보(慶南日報)』, 발행인 겸 편집인은 김홍조, 인쇄인은 이준기로 하는 신문발행 허가 청원서를 관찰부에 제출했다. 이 신문은 가장 문명개화가 늦었다고 평가받던 경남지역의 유지들이 출자하여 설립한 것이었다. 그 주도적인 인물은 김홍조·김영진·김기태 등이 있었고, 경남관찰사 황철도 크게 지원하였다. 직접 신문 제작에 관여한 인물들은 주로 하급 관리를 역임한 경남의 지주와 자산가들이었다. 황성신문은 1909년 2월 23일 자 논설을 통해 「경남일보 창립에 충고함」을 실어 경남일보의 태동을 알렸다.
주필로 장지연을 초대하여 1909년 10월 15일 마침내 경상남도 진주에서 창간호를 펴냈다. 경남일보 창간호는 타블로이드판(63㎝×46㎝) 4면, 6단 36행, 1행 13자로 국한문 혼용체제였다. 창간호에 금릉위 박영효의 축사가 실렸다. 창간 목적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용하여 정치적 의미보다 교육 기능에 주안점을 두어 '민지계발(民智啓發), 실업장려(實業獎勵)'였다. 즉 '법률행정에 대한 지식, 실업의 지식, 교육의 발달, 삼강(三剛)의 일사(逸史)'였다. 대한매일신문은 1909년 11월 26일 자 「慶南日報를 祝하노라」 논설에서 "十三道地方에 此慶南日報一個가 始有하니(13도 지방에서 이 경남일보 1개가 비로소 있으니)"하며 '경남일보가 지방신문의 시초'라고 밝히고 신문읽기를 권하였다. 신문 참여자 중에서 김기태(1887~1941)는 발행 임시사무소장을 맡아 신문사 설립 추진을 하고 나중에 부사장을 맡았다. 그는 지방의 계몽과 근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한 재산가요, 경남지방의 유력자였다. 진주군 학무위원으로 봉양학교와 동명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중추원 참의, 경남 평의원, 경상농공은행 취제역을 지낸 그는 1937년 경상남도 총후지성회 부회장이 되어 애국기 '진주호' 헌납운동을 주도하고, 1939년에는 특별지원병 진주후원회 고문이 되어 지원병 지원 유세를 하는 등 친일부왜 활동을 펼친 인물이기도 하다.
경남관찰사로 재임하면서 신문 창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황철은 이후 경남지역 소속 관청과 사무소에 신문 구독을 권유하거나 면내 신문 구람소를 확보할 것을 지시하는 등 신문을 통한 인민의 계몽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신문의 행정적 조력자이자 후원자였다.
신문사의 주필이었던 장지연(1864~1921)은 강제 병합 이전에는 항일 계몽언론인이었지만, 그 이후는 친일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장지연은 1895년 민비 시해 사건(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궐기 호소 격문을 각처에 발송하였고, 1896년 아관파천 때에는 고종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를 기초 작성하였다. 1897년 7월 독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898년 내부주사(內部主事)를 사직한 후 9월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창간되자 기자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 만민공동회의 총무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곧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해산되면서 체포되기도 하였다. 1899년 이후 『시사총보(時事叢報)』와 『황성신문』 주필로 활동하다가 1902년 8월 『황성신문 』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지연은 20일 자 신문에 을사늑약 체결에 서명한 5적(賊)을 '개돼지만도 못하다(豚犬不若)'라고 격하게 비난하는 사설인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 민족의 의분을 만천하에 토로하고, 국민 총궐기를 호소하였다. 이후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65일간 투옥되었으며, 『황성신문』은 1906년 2월 12일까지 정간되었다. 1906년 이후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흥사단에 활동하였으며, 1907년 1월 국채보상운동 동참을 호소하는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1908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의 『해조신문(海朝新聞)』 주필로 초빙되었으며, 같은 해 5월 『해조신문』 폐간 후 상하이[上海]·난징[南京]을 거쳐 9월 귀국하였다.
1909년 10월 장지연은 경남일보 주필로 활동했다. 1910년 8월 이후 『대한매일신보』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로 이름을 바꾸고 중앙의 나머지 신문들이 모두 폐간되었지만, 『경남일보』만은 폐간되지 않았다. 대신 사설이 없어지고 사전검열을 계속 받았다. 본래 일간으로 출발하고자 하였으나 실제로는 격일 간으로 발행되었다. 장지연은 1910년 10월 11일 자(제148호) 「사조(詞藻)」란에 한일강제 병합을 비난하며 8월 30일 자결한 매천 황현의 「유시(遺詩)」를 게재하고 평을 달았다. 이로 인해 치안방해 이유로 발매 반포 금지, 압수당하여 『경남일보』는 「신문지법」 제21조 위반으로 10월 25일까지 10일간 정간되었다. 복간된 『경남일보』는 일본 천황 메이지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기념 신문을 발행하는 등 친일적 경향의 보도를 하였다. 그는 1913년 신병을 이유로 『경남일보』 주필을 그만두고 마산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마산에 있었던 통도사 경봉스님과 교류하며 불교와 인연을 맺고 서신 왕래를 하였다. 장지연은 1914년 12월부터 1917년 12월까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객원 주필로 활동하면서 식민정책을 옹호하거나 식민체제의 우월성과 동화정책을 선전하는 등의 친일적인 논설과 작품을 발표하였다. 처음은 항일 저항적 언론이었다가 1910년 이후는 친일 언론인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대표적인 언론인이 장지연이다. 그는 1921년 10월 2일 병사하였다.
김홍조는 1904년 경성의 미동(美洞)의 박문사(博文社)의 주주와 1920년 동아일보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는 그가 신문발행의 목적인 인민 계몽에 관심을 많이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김홍조는 신문 창간 후 1910년 4월 12일 정기주주총회에서 사장직을 강위수(姜渭秀)에게 넘기고 물러났다. 그는 경남 신문 창간에 이바지했지만, 신문발행을 통한 사회 활동은 짧았다.
『경남일보』는 경남지역의 문명개화의 도화선 역할을 하였지만, 사회진화론적 관점에서 개화 자강을 목표로 하는 실력 양성론의 입장에 있었다. 신문 보도의 내용을 보면, 강제 병합 이후에는 저항과 투쟁보다는 '식민지적 인간' 형성에 이바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경남일보도 당시의 시대 상황에 따른 민족주의와 친일주의 양자 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강위수가 1910년 『경남일보』 사장 재직 중 일본 시찰 후 그는 좌담회·간담회 등을 통하여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널리 홍보하는 데 앞장섰다. 이 목적으로 김기태 등의 일본 감상문을 『경남일보』를 통하여 주민들에게 소개하였다. 1911년 11월 3일 경남일보사의 천장절(일왕 생일) 기념식 주최도 이러한 인식의 발로에서 비롯되었다. 강제 병합 이후인 1910년대는 언론계의 암흑기였다.
"조선이 식민지화한 당시에 조선사람의 사상과 그 취체(取締, 통제와 단속)가 여하(如何)하였는가는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보통학교 훈도가 「사벨」을 차고 군청 서기가 사벨을 찾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는 극도로 제한되었으니 조선에 언론기관이라 할 만 한 것은 전무한 어둠컴컴하고 어마어마한 시대였다. 다만 총독부 기관지로 매일신보가 있었고 민간신문으로는 지방에 김홍조씨와 장지연씨가 한 경남일보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사(時事)와는 전연 관계가 없는 것이었으니 이 시대는 실로 언론계의 암흑시대였다." (『동광』, 제28호, 1931.12.01.)
김홍조는 부친 김규환이 1910년 9월 18일 사망하게 되자 김홍조는 진주에서의 경남일보 일을 그만두고 울산으로 돌아와 삼년상을 치르는 기간에도 울산 학성공원 안에 영호정(永護亭)을 짓고 지역민들의 개화에 힘썼다고 한다. 1911년 5월 김홍조는 제국재향군인회(帝國在鄕軍人會) 울산분회 특별회원에 추천되고, 울산군 참사(參事)에 임명되었다가 1913년 5월에 의원 면직되었다. 일제강점기 참사는 조선총독부가 지역의 학식과 명망이 있는 사람 중에 임명한 명예직이었다.
그런데 왜 김홍조는 양산의 만석꾼 경주 김씨 김정훈을 사위로 받아들였을까? 한일강제 병합 이후라 김정훈의 부친과 조부가 일본군과 전투하다가 체포되어 사형당한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상황에서 외동딸과 결혼시킨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김홍조는 당시 선각자이지만 사업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려는 시기였다. 당시 경남지역의 거부는 부산의 윤상은, 양산의 김정훈, 울산의 김홍조, 경주의 최준 집안이었다. 김홍조는 차남 김택진과 부산의 윤상은의 장녀 윤연숙을 결혼시켜 사돈이 되었다. 윤상은은 구포은행과 경남은행과 사업적 동반자이다. 여기에 백산상회를 경영했던 최준과도 연결된다. 김홍조가 만석꾼 김정훈을 사위로 받아들인 명백한 이유는 양쪽 집안에서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당시의 부잣집 사이의 결혼이었다. 다만 김정훈 부친의 사망 이유를 알면서도 혼인을 한 이유는 과거 활빈당과 연관이 있었던 김재복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김재복이 소금 장사로 부를 축적했다고 하는데 이 소금이 김홍조의 부친이 생산한 소금이었을 수도 있다. 선대 시절부터 인연을 맺고 혼사에 대한 약속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김홍조의 사후에 차남 택진(1907~2003, 부산대 건축과 교수)과 윤상은의 장녀 연숙과의 결혼도 부모끼리의 약조 때문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울산작가회의 울산민예총 감사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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