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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 사람들이 가족계획 시범 사업비 받아 한 일

[서평] 월평마을 120주년 기념 사진집 '월평'

등록 2021.02.01 13:45수정 2021.02.02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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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마을 사람들 ⓒ 에코미디어

 
우리나라 곳곳, 도회지, 농촌, 어촌, 산촌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는 수많은 마을 중 이런 마을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이런 마을은 없을 것으로 어림되고, 이런 기록을 갖고 있는 마을은 더더욱 없을 거라 가늠됩니다. 대단합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책을 뒤적여 가며 생각해보고, 생각을 더듬어 가며 뒤적여 봐도 정말 대단합니다.

전남 장흥 월평마을은 120년 전에 생긴 마을입니다. 1982년, 이 마을 가구 수는 140세대이었고, 인구수는 834명, 남자가 423명 여자가 411명이었습니다. 마을사람들 중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가임대상은 44명이었습니다. 이들 44명이 가족계획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6명은 정관 수술을 했고, 26명은 난관수술을 했습니다. 5명은 루프시술, 2명은 콘돔사용, 5명은 자연피임 대상자입니다.


마을사람들은 정·난관 수술을 하는 대가, 가족계획 시범마을 사업비로 2백만 원을 받았습니다. 이 돈은 마을 안길을 포장하는 데 필요한 시멘트 200포와 골재 10차를 사는데 쓰였습니다. 마을 안길을 포장하는데 필요한 재료는 이렇게 마련할 수 있었지만 정작 길을 포장하는 공사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노동은 온전히 동네사람들 몫이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기계(포클레인)가 흔하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땅은 삽과 괭이로 파가며 골랐습니다. 날라야 할 것들은 리어카와 지게로 지어 날랐습니다. 남자들은 등짐으로 지어 나르고 여자들은 머리로 이어 날랐습니다.

남의 동네 이야기, 부부끼리 이부자리 속에서나 쉬쉬 거리며 나눌 피임 소식까지 어찌 그리 상세히 아는지 궁금할 겁니다. 누군가 습작이라도 하듯 남겨 놓은 기록이나 떠도는 소문에 살짝 허풍을 보탠 소문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이건 마을에서 공식적인 문서로 작성해 전해지고 있는 것을 사진으로 엮은 마을앨범 내용 중 일부입니다.

마을 유래부터 120주년 기념식까지 기록한 <월평>
 

<월평>(사진 마동욱, 글 임형두 외 6인 / 펴낸곳 에코미디어 / 2021년 1월 일 / 값 50,000원) ⓒ 에코미디어

 
<월평>(사진 마동욱·글 임형두 외 6인, 펴낸곳 에코미디어)은 개촌 120년을 맞은 월평마을, 전남 장흥군 장흥읍에 있는 월평마을을 사관의 마음으로 사진 찍고, 그림을 그려가듯 묘사한 글로 엮어낸 월평마을 기록집입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 찍고, 글 꽤나 쓴다는 사람들에게 부탁해 쓴 그럴싸한 기록이 아니라 마을 유래부터 책이 출판되기 직전까지 월평마을에 대이어 살아오고 있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살아온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를 발굴해 정리한 기록입니다.


월평마을이 대단하고, 월평 사람들이 더 대단하다고 하는 것은 사진 속 인물들이 잘나서도 아니고 글발이 좋아서도 아닙니다. 마을 살림과 마을 역사를 마을문서로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마을문서를 고스란히 보존시켜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대단합니다.

1980년 초부터 만들어진 월평마을문서는 단순한 회의록이나 회계장부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때 당시, 월평마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영향을 미쳤던 정부시책, 정치, 경제, 사회제도 등을 실감나게 어림해 볼 수 있는 종합적인 기록입니다.

9살 첫사랑부터 93살 할머니 사별곡까지

사진들은 셔터를 누르던 순간 파사체가 되었던 월평마을 모습과 월평마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 2020타임캡슐이고,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 시부모 봉양하고 자식들 낳아 키우다 보니 어느새 파파할머니가 된 어르신들이 들려주신 이야기는 책으로 엮으면 한 권도 넘을 사연이고 한탄입니다.
 
"학교 운동장에서 도롱태(굴렁쇠) 궁글리며 놀고 있는디, 여자아이가 나타났어, 눈에 확 들어와, 눈이 크게 떠졌지. 입이 딱 벌어져갔고 봤어, 처음 봤을 때 애기여. 내가 9살인가 그랬고 집사람이 5살이었어. 그래가지고 지금까지 좋아해, 동생 친구였어." -272쪽-
 
"시집 올 때 얘기 해 주라고? 보따리 하나 들고 왔제, 그 시상에 뭐가 있었당가? 차가 없응깨 20리를 걸어 나와야 써, 대덕 차부에서 차를 타면 미륵댕이에서 내려 줘, 그라면 또 걸어와, 그라고 시집 왔어. 뭐 갖고 왔냐고? 목화 심궈서 그것을 따 갖고 실을 뽑아서 베 짜 갖고 그런 놈으로 저고리 해서 갖고 왔재. 다래, 그것이 솜이 되야, 그랑께 그거 묵으면 문둥이 된다고 했는디 몰래 따묵어, 달큰하니 맛있응께." -268쪽-
 
9살 첫사랑 이야기는 27년 동안 교사로 재직하다 퇴직한 이형신씨 이야기이고, 보따리 하나 들고 시집온 이야기는 73년 전에 월평마을로 시집와 월평마을에 살고 계시는 93살 윤복님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월평마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 에코미디어

 
월평마을 120년을 온전히 담고 있는 이 책은 월평마을 탄생 120주년 기념행사가 코로나19로 여의치 않게 돼 표지석 제막식만 간단하게 치르던 자리에서 얘기돼 시작된 결과물입니다.

마을 사람 개개인이 갖고 있던 사진들을 내놓고, 마을 사람 개개인이 사연과 비밀로 간직하고 있던 이야길 꺼내 놓음으로 월평마을 120년을 담은 <월평>이 완성되었습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월평>과 같은 마을기록을 마을단위로 제작·시도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는 건 필자가 작년 10월부터 내려와 살고 있는 내 고향 마을도 이런 기록쯤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부러운 갈증일 겁니다.
덧붙이는 글 <월평>(사진 마동욱, 글 임형두 외 6인 / 펴낸곳 에코미디어 / 2021년 1월 일 / 값 50,000원)
#월평 #마동욱 #임형두 #에코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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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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