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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와 함께 받은 질문... "당신은 진정으로 행복하십니까?"

[공연리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

21.02.21 09:32최종업데이트22.02.04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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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0 창작산실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21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의 공연을 마치고 나오니 관객에게 사과를 나누어줬다. ⓒ 이규승

 
"공연 끝나고 나가실 때 사과 받아가세요."

객석에 들어서자 티켓을 확인했던 매니저가 등 뒤에서 외치는 소릴 들었다. 설마 먹는 사과? 과일을 나눠주는 건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작품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었다면 더욱 미궁에 빠졌을 테다. 홍보물엔 양쪽을 크게 깨물어 먹은 빨간 사과가 실렸다. 스티브 잡스의 아이콘과 같았던 한입 깨물어 먹은 바로 그 이미지가 떠오른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0 창작산실 중 무용 부문에 선정된 <그런데 왜 사과를 까먹었습니까>(~2월21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의 현장이다.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공연이 어떻게 전개될지 등 궁금한 점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붉은 배경 말곤 아무런 장치 없는 무대엔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좌우를 가로지르는 천은 일렁이는 파도 또는 바람을 타는 갈대숲을 떠올린다. 아마 아무것도 없는 자연 그대로 태초의 모습을 담는 데 더할 나위 없어 보인다.

어둠이 걷히자 살과 살이 맞닿아 뒤엉켜 있던 남녀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맨살이 드러난 두 남녀의 실루엣이 정적을 깨고 천천히 움직인다. 몸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무용의 백미가 공개되는 순간이다. 몸동작 하나하나에 관객은 시선뿐 아니라 숨소리까지 빼앗긴다. 객석은 1%의 미동도 허락하지 않을 만큼 긴장감이 고조에 이른다. 대극장이라는 무대 사이즈 때문에 조금 더 가까이 볼 수 없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미간을 찌푸려야 볼 수 있는 거리 덕분에 상상의 즐거움은 무한대로 치솟는다. 가까이하고 싶지만 가까이할 수 없는 적당한 거리두기. 첫 번째 밀당.
 
천장에서 시나브로 내려오는 뒤엉킨 형체는 머지않아 나무임을 직감한다. 인류가 시작했던 태초에 선악과를 던져준 사과나무. 그곳에서 파생된 변화무쌍한 사과는 공연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오브제임은 분명하다. 붉은 배경과 대비되어 더욱 돋보이는 사과. 60분간 이어지는 공연을 책임질 중요한 주제. 에덴동산에서 살던 아담과 이브는 사과를 한입 물며 새로운 전환을 맞이한다. 이 사건이 영원할 거 같던 천국의 시간을 멈추게 할지 당시엔 몰랐을까.
 
낙원에서 쫓겨나게 만든 사과는 문명의 본질을 일깨워준다.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진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두 번째 몸동작이 새로운 공연을 시작한다. 이전 무용과는 전혀 다른 현대적(?) 몸짓이 무대를 가득 채운다. 2000년대 춤의 신기원을 장식한 대중스타의 등장. 초반을 장식한 정통 무용수의 몸동작과는 근육 구조가 다르다. 게다가 문명의 혜택을 받은 전동장치의 도움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인다. 사람인지 로봇인지 구분하기 힘든 절제된 웨이브는 얼핏 보아도 동시대성을 반영하는 몸짓이다. 서로 다른 체질을 가진 두 동작을 통해 시대가 급변하게 흘렀음을 암묵적으로 보여준다.
 
"네가 나무라면?"
"네가 동물이라면?"
"네가 형태라면?"
"네가 숫자라면?"
 
전작에서 다양한 내러티브와 캐릭터를 보여준 김윤정 안무가의 특징이 이번에도 등장했다. 몸짓에 빠져들기도 벅찬 시간에 정적을 깨고 던지는 대화들. 새로운 영역을 넘나드는 시도처럼 작품은 더 많은 이미지를 표현한다. 상당 시간 이들은 다양한 질문을 주고받는다.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하듯 정해진 공식대로 답변을 늘어놓는다. 우리가 예상한 답변들. 그리고 지식검색에서 나올 법한 답변이 줄을 잇는다. 영혼 없는 감정에 휩싸인 진실의 대답들. 마지막을 장식하는 한 질문에 이번 공연의 주제를 엿볼 수 있었다. 대화의 의도를 파악하려 했던 시간에 대한 보상이랄까. 주제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그래서 행복해?"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 공연을 마치고 무대인사를 하는 무용수와 김윤정 안무가 ⓒ 이규승


몇 번을 반복하는 행복이라는 단어. 공연은 '행복'의 의미를 묻는다. 당신에게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다. 행복을 전해줄 거 같았던 인류의 사과를 통해서 결국 해답을 찾았는지 묻고 있다. 선악과를 깨물어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 그 후예인 인간은 뉴턴의 만류인력으로 과학에 눈을 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문명의 발전은 오히려 신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신이 인간의 고민을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불행은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나아진 삶을 기대하는 것이 짧은 생각임을 알게 될 정도로 피폐해졌다. 이제는 4차 산업혁명과 새로운 시대를 앞둔 전환기에 돌입한다. 이전의 과학과는 다른 빠른 속도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손안에 휴대폰 하나만 있으면 남부러운 것 없는 세상이지만 편리함을 추구했던 스마트폰이 오히려 세상을 한 뼘 안에 구속한다.
 
무대에는 일곱 명의 무용수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들은 한결같이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바쁜 세상에 빠져든다. 모두가 하나의 시선에 꽂혀있지만 저마다 칼 같은 군무에 맞춰 획일적으로 움직인다. 손을 보고 있지만 세상이 정한 알고리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조종된다. 과학에 의해 지배받는 불쌍한 인간들. 사람은 뇌가 없이 명령에 따라 동일하게 춤을 춘다. 진실을 알려주지만 진정한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는 시대. 탈진실의 정보가 난무한 복잡한 세상을 표현한다. 누구와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제대로 된 소통인지 자신이 없다.
 
7명의 무용수는 두 명씩 짝을 이뤄 무대를 휘어 저으며 뛰어다닌다. 눈을 마주친 짝은 수시로 변한다. 어깨를 맞닿아 스쳐 지나갈 때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빼앗는다. 수많은 사람이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듯 눈을 마주친 이들은 연신 타인의 시선을 강탈한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을 내어줄 것 같았던 마주침도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줄 거 같지만 타인에게 눈길을 돌린다. 뺏을 거 같지만 뺏기지 않는 모양새. 마치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자기장이 깔린 자석같이 세상은 복잡하다. 두 번째 밀당.
 
"늦은 새벽 혼자만 깨어 맥주 마시며 영화 볼 때" (강민경)
"새벽 4시까지 춤 이야기하다가 다음 날 8시 출근 성공할 때" (김강민)
"한강에서 라면기계에 라면 끓여 먹고 맥주 마실 때" (김유정)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지 않고 바람결에 머리를 말리며 산을 오를 때" (김주희)
"생일 케이크 처음 받았을 때" (배민우)
"죽음을 목도하며 나의 삶에 대해 생각할 때" (신현아)
"집 마당에 밤새 내린 눈을 처음 밟을 때" (팝핀현준)
 
한 시간을 빼곡히 채운 7명의 무용수가 한 마디씩 거들었다. 처음 공연을 시작할 때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당신의 행복은 무엇인가요?" 공연 중간 영상을 통해 보여줬던 슬라이드 이미지는 이에 대한 답을 부연 설명한다. 아주 일상적인 것들. 어린 시절의 사진을 포함해 너무나 평범한 모습이 기억의 장면처럼 흘러간다. 아마도 각자 생각했던 행복이 무엇인지 대답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하지만 이전의 질문과 다르게 여기엔 정답이 없다. 너무나 평범해 그것이 행복인지 몰랐을 정도로 지극히 보통의 답변들이 즐비하다. 그것이 우리 곁에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행복은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고 싶었을까.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을까.
 

사과는 인류의 역사에서 어떤 존재였을까. 과연 행복을 가져다 주었는가를 물음으로써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알려주고자 한다. ⓒ 이규승

덧붙이는 글 본 게시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산실 공식 채널에 동시에 게재됩니다.
창작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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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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