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선생의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추모시비 허균 선생의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추모시비
오승준
일정한 직업도 없이 늙을 때까지 떠돌아다니며 절간을 찾거나 음식을 빌기도 하고 시골 한량들의 시나 부고(訃告) 같은 것을 지어 주는 댓가로 몇 푼 받아 술을 마시며 살았다. 배가 고프면 산 열매를 따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하지만 그는 결코 품격을 잃지 않았다. 고매한 선비 방랑객으로서 산하를 주유하면서 자유혼을 지켰다.
당대의 시인 서예가 양사언과는 각별한 우의관계였다. 가끔 찾아가서 공술을 대접받았다. 양사언이 귀찮았던지 한 번은 술상을 내놓지 않았다. 이달은 시 한 수를 써 놓고 집을 나왔다.
나그네 가고 머무는 것
주인의 눈썹머리에 달렸다네
오늘 아침 황기(黃氣:술기운) 없으니
곧장 청산(돌아갈 곳)이 생각나는구려.
양사언이 뒤쫓아와 주막에서 얼큰히 술대접을 했음은 물론이다.
모란봉 밑에 있는
선연동 골짜기에는
그 속에 미인들 묻혀 있어서
풀빛 언제나 봄과 같구나
신선의 환술을
빌릴 수만 있다면
그 옛날의 가장 아름답던 이들
불러일으킬 수 있으련만.
평양 북쪽의 선연동(嬋娟洞)은 예부터 기생들의 무덤이 있기로 유명한 곳이다. 남정들이 "선연동 속의 혼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할 정도로 미인들의 무덤이 많았다.
어느 해 봄날 이달은 불현 듯 선연동을 찾았다. 때마침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물기 머금은 구름은 무덤 위를 무심코 떠돌고 있었다. 그래서 이달은 아무 무덤이나 찾아 한 잔 술을 부어 놓고 시 한 수를 읊은 것이 앞에 인용한 시다.
하지만 그는 정처없이 떠돌면서 음풍농월이나 즐기는 한인(閑人)은 아니었다.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로 백성이 얼마나 어려움에 처하고 있는가를 싯구에 담아 이들을 질타했다. 허균이 "시골집의 어려운 식생활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 같다"고 평가한 바 있는 「동산역시(洞山驛詩)」도 궁핍한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민중의 실상을 노래한 저항시에 속한다.
시골집의 젊은 아낙은 저녁거리가 없어서
빗속에 나가 보리를 베어 초가집으로 돌아오네
생나무는 축축해서 불길도 일지 않는 데
문에 들어서는 어린애들은 배곺다 우는구나.
이달이 죽을 때 세상에 남긴 것이라곤 '시인'이라는 이름뿐 달리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다. 허균과 허난설헌이라는 조선시대 최고의 경지에 이른 남매 시인과 '역수어'를 키웠다. 허균은 그에게서 저항정신과 자유혼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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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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