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 상황에서 정수기는 이제 무용지물.
이준수
그렇게 1년이 지났고 새 학년이 시작된 요즘, 나는 결국 이동형 정수기를 구입하고 말았다. 정수기라고는 하지만 대단한 전자제품은 아니고, 주전자처럼 생겨서 필터 교환식으로 사용하는 무전력 정수기다. 다 쓴 필터는 모아두었다가 반납하면 업체에서 처리를 거쳐 재활용한다고 들었다.
학년에서 생수를 사자는 말이 나오기 전에 미리 냉큼 정수기를 구비한 이유는 "제 몫은 빼주세요"라고 말하기 위해서이다. 가격은 조금 나가지만(그렇다고 사치품은 절대로 아니다) 적어도 1년에 생수 수십 통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텀블러와 정수기 그리고 수돗물만 있으면 충분하다. 나는 이 단출한 구성이 마음에 들어 본가와 처가, 아내까지 총 4대를 구입했다.
그렇지만 나는 직장 내 다른 분들에게 내 취향을 강요할 의향이 없다. 편리함과 금전 절약 면에서는 생수가 정수기보다 유리하다.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생수 이용이 더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내 몫만큼의 생수를 빼달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메시지 전달 방식에 불과하다. 그러나 간접적인 전달 방식은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
우리 반을 방문한 선생님 한 분이 정수기를 신기해 하길래 취지를 말씀드렸다. 혹시 유별난 사람으로 바라볼까 하여 약간 긴장하였으나, 오히려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타지에서 동향 사람을 만난 기분이라고 할까. 본인도 쓰레기 만들기 싫어서 물을 들고 다닌다면서,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기쁘다고 하였다. 우리는 연대감으로 똘똘 뭉친 게릴라들처럼 웃었다.
학생들도 담임의 이상한 물건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수돗물을 넣었는데 어떻게 마실 수 있는 물이 되는지 아주 놀라워한다. 나는 연금술사라도 된 양 세면대에서 수돗물을 거듭 퍼다 날랐다. 졸졸졸, 물줄기는 빈약했지만, 아이들의 커다래진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나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수업 재료로 써먹는다.
우리가 학교에서 공용정수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이다. 학계의 추정에 따르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박쥐의 몸에 존재하다가 몇몇 매개 동물을 거쳐 인간에게 옮아왔다. 최근 십수 년간 사스, 메르스 등의 동물 유래 바이러스에 인간이 쉽게 노출된 까닭 중 하나는 무분별한 개발과 자원 착취로 인한 야생동물 서식지 침범도 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생수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중국과 미국을 돌아,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미세 플라스틱에 이른다. 종국에는 무한 소비 혹은 무한 성장이라는 목표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 물음까지 나아갔다. 종이 한 장에서 구름과 숲, 벌목꾼을 이야기한 틱낫한의 책 속 장면 같았다.
수업에 흠뻑 빠진 어떤 아이는 나랑 똑같은 정수기를 사겠다고 말했다. 어쩐지 정수기 영업사원이 되어 버린 것 같아 당혹스러웠지만, 아이의 마음에 공감하며 약속했다. 이 정수기도 금방 싫증 나서 버리면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그러니까 한 번 구매한 물건은 잘 관리해서 오래 쓰자고. 대견한 마음에 상으로 물 한 잔을 주고 싶었지만, 물을 공유해서는 안 된다는 방역 원칙에 따라 꾹 참았다.
▲ 3년 전 강릉 커피 축제에서 무료로 받은 텀블러와 무전력 정수기.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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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미래의창 2024), (선생님의 보글보글, 산지니 2021) 을 썼습니다. 글쓰기와 달리기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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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정수기 사용 금지... 내가 찾은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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