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인근 통주에 있는 이탁오 묘. 그는 아이들의 마음을 지순하게 보는 동심설을 주창했다 베이징 인근 통주에 있는 이탁오 묘. 그는 아이들의 마음을 지순하게 보는 동심설을 주창했다
조창완
54세가 되던 해 관직을 버리고 운남성 계족산에 들어가 칩거하며 『대장경』을 읽는데 몰두하였다. 이 무렵부터 두루 천하를 주유하면서 벗을 사귀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그야말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그의 인식체계와 함께 행동에 있어서도 파격적이었다. 62세의 장년기를 맞아 머리를 깎고 호북성 지불원(芝佛院)이라는 사찰로 들어갔다. 절에서 살면서 승복으로 바꿔 입고 열띤 강학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지불원에 거처할 무렵 그의 모습은 참으로 기괴했다. 머리는 깎아 삭발했으되 수염은 길게 길렀으며, 옷은 승복을 입고 긴 담뱃대를 물고 다녔다. 기행은 계속되었다. 지불원의 반유반불(半儒半佛)의 생활을 여러 해 동안 하면서 불교철학을 습득한 다음, 만년에는 서양 신부 마테오 리치와 여러 차례 만나 기독교사상에 심취하게 되었다.
도학자들의 비난과 탄핵이 빗발쳤다. 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떠돌이 중(遊僧)을 추방하고 흉악한 절간(浮寺)을 허물어 바른 도(道)를 수호하고 풍속의 교화를 유지하기 위해" 그가 묵고 있던 지불원과 나중에 유골을 안치하려고 만들어 두었던 장골실(藏骨室)을 파괴하였다.
이탁오는 박해를 견디면서 글을 쓰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공의 글은 결코 많지 않았지만, 가슴 속의 독자적 견해를 피력할 때에는 눈부신 빛이 쏟아지는 듯 하며,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시(詩)도 많이 짓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신운(神韻)의 경지가 깃들어 있다. 또한 서예를 즐겨서 매번 먹을 갈고 종이를 펼치면, 옷섶을 풀어헤치고 크게 소리치며, 토끼가 펄쩍 뛰어오르고 매가 세차게 하강하는 듯한 기세로 써내려갔다.
그 중 득의한 작품은 역시 대단히 훌륭했는데, 수축하면서도 기운차고 기세가 넘치고 빼어나서, 만 근의 철완(鐵腕)으로 써낸 듯하며, 날카롭고 거침없는 기골이 종이 위에 거칠고 거세게 펼쳐졌다.(분서)
그는 몇 권의 책을 썼다. 대표작이라 할 『분서』는 '태워 버릴 책'이라는 이름 때문에 과격한 내용으로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가 주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것인데, 치밀한 논리와 차분한 말투에 오히려 압도당할 정도이다. 『장서』는 73세 때 남경에서 간행되었다.'숨겨둬야 마땅할 책'이라는 『장서』와 『설서(說書)』, 『구정이인(九正易因)』등이 있다.
그의 저술에는 가슴 저리는 에피소드가 전한다. 자기의 책이 출간되면 당국에 의해 불태워질 것이라고 예언하여 책 이름을 『분서』라 짓고, 또 책을 저술하더라도 결코 햇빛을 보지 못한 채 매몰될 것이라 하여 『장서』로 이름지었다.
실제로 이 책들은 '분서'가 되고 '장서'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유교적 통치체제를 근본에서부터 뒤흔들게 될 그의 저서가 나오는 속속 불태우거나 땅에 파묻어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을 금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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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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