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라 모토유키
노무라 모토유키
1945년 8월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고 미국이 일본을 점령했다. 그러자 일본인들은 재일동포들은 더욱 심하게 내놓고 '3등시민'으로 대하며 차별하고 혐오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유학 와 있던 김오남을 만났다. 김오남은 전라북도 출신이었다. 한국에서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김오남은 큰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또 한국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숙소나 직장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래서 그는 김오남에게 숙식을 제공 해주며 언젠가 한국을 방문하겠노라고 마음먹었다.
한편, 평소 동물을 좋아하던 노무라는 1950년 도쿄대학 수의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마취제가 부족해 동물들을 마취제 없이 해부하고 실험하는 것에 그는 큰 충격을 받고 수의학을 전공한 것에 큰 후회와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53년 말 그에게 미국 유학길이 열렸다. 그래서 그는 도미해 전공을 수의학에서 신학으로 바꿨다. 그 후 미국 켄터키성서대학, 남동부기독교대학, LA바이올라종합대학, 페퍼다인대학원 등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후 1961년 유학간지 8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8년간 유학생활은 노무라가 일본의 재일동포 차별문제를 더 깊이 피부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그는 장학금을 받았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접시 닦기 등 여러 '알바'를 해야 했다. 2차대전과 6.25전쟁 또 1955년 시작된 베트남전쟁 때문에 그런지 당시 그가 만난 다수 미국인들에겐 반일감정, 반중감정, 반베트남감정이 강했다. 그래서 그는 미국 백인들로부터 종종 유색인종에 대한 심한 인종차별을 처음으로 겪었다. 그 와중에 그는 테러사고를 당해 왼쪽 신장을 잃는 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인 1953년 말 그는 버스의 좌석에 백인석과 흑인석이 따로 있는 것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뿐이 아니라 화장실, 수영장, 체육관, 식당 등도 모두 인종별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는 흑인도 백인도 아닌 몸이었기 때문에 어느 쪽 시설을 이용해야 할지 상당히 난감했다. 그는 미국에 살면서 미국은 맥아더 장군이 점령국 일본에서 선전하고 있던 이상적인 나라는 아닌 것을 실감했다.
그가 공부하던 켄터키의 작은 성서대학에서 1954년 9월 신학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학생들 중에 흑인은 한 명도 없었다. 어느 날 그는 동네 교회의 수요일 저녁예배에 참석하고 싶어 대학으로부터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교회를 찾았다. 큰 무거운 교회 문을 밀고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키가 큰 한 백인남성이 그에게 다가오며 이렇게 물었다. "네가 동네신문에 소개되었던 '쪽발이 소년(Jap boy)' 인가?"
노무라는 기독교인이 자신을 '쪽발이(Jap)'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래도 공손하게 "Yes, Sir.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백인남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는 '쪽발이'를 수용하는 교회는 아니다! 당장 나가!(Get out!)"라며 소리쳤다. 그러면서 키가 작은 그의 목 셔츠의 목덜미를 꽉 쥐며 그를 문밖으로 내던져버렸다. 그는 미국의 무서운 인종차별을 피부로 체험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에 사는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게 받는 차별문제를 더욱 깊이 실감하게 되었다.
빈민선교를 하면서 만난 김진홍 목사

▲ 노무라 모토유키
노무라 모토유키
1961년 미국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후 그는 재일교포 차별문제에 더 깊이 적극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재일교포 차별에 대한 사죄의 마음으로 마침내 1968년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한국에서 청계천 빈민가 등을 방문한 그는 한국의 노동자와 서민들이 받는 고통에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의 빈민선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3년 그는 한국의 도시산업선교회를 방문해 자신이 빈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도시산업선교회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정희 정권하에서 긴급조치에 의해서 감옥살이를 했던 사람들이었다.
이후 도시산업선교회의 한 관계자는 그를 활빈교회로 안내해 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김진홍(1941~ ) 목사와 만났다. 그는 당시 한문과 영어단어로 김진홍과 간신히 의사소통을 했다. 김진홍은 "한국의 많은 교회는 지금 거의 미국교회로부터 경제원조를 얻고 있지만 활빈교회는 자립·자활·자양·자전도를 하고 있다"며 자랑스러운 듯 그에게 말했다. 그런 활빈교회를 위해 노무라는 연대활동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김진홍은 그에게 활빈교회를 위해 카메라, 전기면도기, 악기, 학생교재, 의료품 등을 구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일본, 독일, 호주 등에서 모금활동을 벌이고 추가로 자비를 털어 김진홍에게 카메라 몇십대, 독일제 전기면도기, 수 톤의 의료품, 학생들을 위한 교재 등을 구입해 전달했다.
그리고 김진홍을 믿고 얼마의 후원금도 주었다. 나는 노무라가 지난 1968년 처음 한국을 방문한 이래 청계천 빈민가를 방문한 뒤 충격을 받고 그 후 한국을 60여 번 방문하며 빈민선교활동에 나섰던 것을 확인했다. 또한 노무라는 독일, 호주, 일본 등에서 모금을 해 20여 년간 2천여 명의 청계천 아동을 위한 급식제공, 자활공동체 탁아소건립 등의 구제활동을 펼쳤다.
그는 그동안 빈민선교를 위해 "한국으로 보낸 돈이 7500만 엔(약 8억 1500만 원) 정도"라고 말했다. 노무라는 지난 2006년 청계천의 사진과 서울 지도 등 1970년대 청계천에 대한 자료 800여 점을 서울시에 기증했고, 지난 2013년 서울명예시민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 2015년 서울에서 노무라는 제1회 아시아 필란트로피 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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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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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의 성자' 노무라 모토유키가 한국 60번 방문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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