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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전탑에 올라야 해도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리뷰]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가 사회를 향해 흘린 변화의 전류

21.04.02 09:47최종업데이트21.04.02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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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포스터 ⓒ 영화사 진진


고용 불안, 산업재해, 초과 노동 시간과 저임금 구조는 한국 사회와 늘 함께해 왔다. 가장 낮은 곳에서 외치는 저항의 목소리가 곳곳에 깔려 있지만, 소리 없는 메아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이때, 사회적 문제를 인식하고 고발하는 사회파 영화 감독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이태겸 감독의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직업이 생존이 되는 현실에서 균열을 발견하는 것으로 첫걸음을 내디딘 영화다. 그러나 이 작품이 동력으로 삼은 것은 고발이나, 사회를 향한 분노는 아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옆 사람을 먼저 살피는 노동자 간의 연대다. 당면 과제는 사람에게서 변화와 희망의 불씨를 찾는 일이다.

정은(유다인 역)은 7년 동안 근속한 회사에서 하청 업체로의 파견을 명령받는다. 그는 사측의 권고사직 처분을 거부하며, 파견 업무를 무사히 수행해 본사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파견이 퇴사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본사는 임금 문제로 하청 소장을 압박한다. 하청 업체에 할당된 인건비가 줄었고, 송전탑 아래 정은의 자리는 없다. 직장 내 자리는 개인의 명예다. 정은은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 철탑에 올라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직업이 존엄이 되는 사회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을 지키기란 어려워 보인다.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의 송전탑 정비 노동자 충식은 파견 노동자 정은이 현장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 영화사 진진

 
하청 업체의 노동자 충식(오정세 역)에게 직업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안전줄이다. 그는 송전탑 수리 일부터 대리 기사, 편의점 아르바이트까지 쪽잠 생활을 불사하며 세 명의 딸을 홀로 건사 중인 가장이다. 정은은 아르바이트 교대를 위해 초행길에 자신을 내버려 두고 먼저 하산한 충식에게 벌컥 화를 내지만, 그에게 원청에서 온 정은의 고충은 투정으로 들릴 뿐이다.

충식은 말한다. "우리 같은 사람은 두 번 죽는 거 알아요? 한 번은 전기구이, 한 번은 낙하. 345,000V에 한 방에 가거든요. 근데 그런 거 안 무서워요. 우리가 무서운 건 해고예요." 원청과 하청 노동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다. 그때, 정은은 권고사직으로 자살한 선배의 영정사진을 떠올리며 그 선을 넘는다. "해고든 사망이든 그게 뭐가 달라요."
 
소속은 달라도 두 사람에게 직장은 곧 삶이다. 충식은 정은을 동료로 인정하고, 원청 사무직 노동자와 하청 노동자 사이의 거리를 단숨에 좁힌다. 정은이 해고되지 않으면, 충식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인사 고과의 경쟁은 잊은 채 둘은 고압선 위의 친구가 된다.

영화는 원청과 하청의 수직 계약 관계와 노노 갈등, 직장 내 성차별 등 '한국 사회의 부당한 노동 현실'을 이야기하면서도 관계와 소통의 끈을 놓지 않는다. 각자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노동자들이 서로를 긍정하게 되는, 희망적인 성장 서사를 택한다. 노동자의 연대를 통해 삭막한 현실을 뛰어넘는 인간의 존엄을 보여주겠다는 게 감독의 변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등장인물의 정서에 더욱 집중하며, 현실과 드라마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데 힘쓴다.
 
후반부 어떤 사건으로 인해 분개하는 정은의 롱테이크신 역시 '현실'을 반영하기 위함이다. 사건의 경중과 관계없이 카메라는 오로지 정은의 반경 안에서 움직인다. 관객은 4분여 동안 원청의 부당함을 고발하고, 무력에 의해 납작한 자세로 바닥에 널브러진 인물을 프레임 중앙에 배치한다. 정은이 받는 정신적 압박과 무력감을 정제되지 않은 카메라 움직임으로 보여준다.

장면 속에서 '여성이자 파견 노동자'라는 정은의 정체성을 낮잡아 이르는 대사가 반복되고, 그가 느끼는 스트레스는 관객에게로 전이된다. 관료주의를 향한 분노, 동료로서의 미안함이 정은의 얼굴에 스치는 동안 사건에는 진전이 없다. 그는 부조리함에 완강히 맞서 보지만, 자꾸 나가떨어지며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한다. 컷으로 상황이 종결되고 나면, 관객은 정은에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을 발견한다.
  

정은은 충식의 도움으로 고소공포증을 극복하고 송전탑에 오르지만, 충식은 추락사로 죽고 없다. ⓒ 영화사 진진

 
하지만 정은은 매일 아침 출근하듯 안전 장비를 챙겨 송전탑으로 향한다. 일상은 다시 시작되고, 노동은 끝나지 않는다. 정은은 고압선에 매달려 정전된 마을을 위한 작업을 시작한다. 정은에게 송전탑은 오르는 순간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거대한 몸집의 '운명'과 같다. 고공 위에 물구나무선 채, 뒤집힌 세상과 마주하게 된 그는 충식을 포함한 동료들과 그들의 노동으로 혜택을 누리는 사람을 떠올린다. 현대인의 편리함 뒤에 가려진 노동자의 숙명이다.

우리는 발전소와 제철소, 건설 현장 노동자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고 있다. 살아 있었고, 부당하게 죽어 나갔다는 것을 증명한 건 남겨진 사람의 목소리다. 정은은 삶의 무게에 짓눌리면서도 나를 해고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인다.

여기에서 '나'는 개인이 아니라, '연대하는 나'다. 끝내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고야 말겠다는 무언의 선언이다.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정은에게서 소리 없는 메아리를 듣는다. 우리가 외면했던 죽음이, 전선에 배치된 이들이 어떤 목소리를 내는지를 말이다.  
 

▲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메인 예고편 ⓒ 영화사 진진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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