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엄태구, 정통 누아르를 멋지게 완성하다

[리뷰] 핏빛 누아르에 담긴 제주도 밤하늘의 낭만 <낙원의 밤>

21.04.05 17:55최종업데이트21.04.05 17:55
원고료로 응원
 

<낙원의 밤> 스틸컷 ⓒ 넷플릭스

  한국 영화로는 유일하게 제77회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돼 해외 평단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영화 <낙원의 밤>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넷플릭스 공개를 택했다. 오는 9일 공개될 예정인 이 작품은 근래 보기 드문 정통 누아르다. 느와르의 낭만과 현실적 잔혹함을 동시에 품고 있는 이 작품의 배경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이국적인 매력을 품고 있는 제주도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신세계>를 시작으로 <대호> < V.I.P > <마녀> 등을 통해 스토리텔러로의 면모를 보여온 박훈정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흥미로운 스토리와 세련된 연출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조직의 표적이 된 후 제주도에서 만난 여자를 통해 희망의 빛을 보고자 하지만 현실의 벽에 당도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어둡고 처절한 핏빛 누아르의 매력

조직의 에이스 태구(엄태구 분)는 상대 조직인 북성파에 의해 유일한 가족이었던 누나와 조카가 죽임을 당하자 복수를 감행한다. 북성파 보스 암살을 시도한 태구는 러시아로 밀항하기 전 제주도로 떠난다. 무기상인 삼촌과 지내는 재연(전여빈 분)은 태구의 등장이 반갑지 않다. 한때 잘 나가던 조직원인 삼촌 때문에 아픈 기억을 갖게 된 그녀에게 태구는 불편한 존재일 뿐이다. 허나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재연은 그 불편함을 티내지 않고 초연한 모습을 보인다.

태구는 재연을 만난 뒤 자신의 존재를 다시 되짚게 된다. 특히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재연을 보며 연민을 느낀다. 이는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런 재연과 태구 사이를 시시각각 위협해 오는 공포가 내륙에서 펼쳐진다. 북성파의 2인자인 마 이사(차승원 분)는 위기의 상황에서 조직을 재정비하고 반격에 나선다. <신세계>와 < V.I.P >에서 선보인 바 있는 박훈정 감독의 어둡고 피 냄새 나는 화면은 누아르 장르를 만나 그 매력을 더한다. 조직 사이의 결투로 피냄새가 진동할 수록, 제주 밤하늘의 아름다움은 상반된 느낌으로 감정을 자극한다.

배우 엄태구의 질감을 담다
 

<낙원의 밤> 스틸컷 ⓒ 넷플릭스


이 작품의 누아르 색채는 배우 엄태구가 지닌 질감을 통해 완성된다. 엄태구의 배역 이름은 그의 이름과 같은 태구다. 태구는 엄태구 그 자체와 같다. 허스키한 목소리와 남성적인 외모를 지닌 그는 누아르와 어울린다. <밀정>에서 하시모토 역으로 강한 카리스마를 발산하며 주목받았던 그는 태구란 캐릭터에 그것을 오롯이 담아낸다. 복수를 결심한 태구의 모습은 극 전체를 강하게 휘어잡는다. 

제주도로 간 이후 시니컬한 재연과 만나며 코믹한 면모를 선보이기도 하지만, 북성파가 나타나며 강인한 생명력을 선보인다. 특히 다수의 조직원들과 뒤엉켜 싸우는 장면에선 재연을 혼자로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 부분은 배신과 암투가 연발하는 누아르 장르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의리와 사랑의 로망을 담는다. 이런 엄태구의 활약은 재연 역의 전여빈과의 호흡을 통해 더 빛이 난다.

대다수 누아르 작품들에서 여성 캐릭터가 조연으로 소비된 것에 반해 <낙원의 밤> 속 재연은 자신의 의지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주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태구의 운명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고자 한다.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관계도 사랑보다는 강한 우정처럼 느껴진다. 재연은 보호받는 존재가 아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마 이사 역의 차승원은 특유의 카리스마와 유머로 극의 흐름을 유연하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한다.

<낙원의 밤>은 어둠이 깊어질수록 밝게 빛나는 밤하늘의 별빛에 주목한다. 태구는 조직이 지닌 그늘에서 벗어나 제주도로 향한다. 그곳이 낙원인 이유는 그가 영원히 잃었다 생각했던 자신과 같은 존재인 재연을 만났기 때문이다. 태구는 자신의 과거와 비슷한 아픔을 지닌 재연을 통해 삶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얻는다.  

그의 희망은 제주도란 공간을 통해 투영된다. 더불어 이 이상향은 태구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된다. 별이 밝게 빛나는 건 주변이 어둡기 때문이다. 제주도에 북성파 무리가 나타나면서 어둠은 점점 짙어진다. 때문에 관객은 이 작품이 그리는 낭만과 현실에 더 깊게 몰입할 수 있다. 

커피로 치자면 진한 에스프레소처럼 정통 누아르의 색을 담아낸 이 작품은 분위기를 통해 몰입을 돕는다. 물론 마지막 10분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스토리를 전개해 극적인 산만함을 가져오는 건 아쉽지만, 오락성에 치중해 지나치게 어둡거나 가볍게 전개하지 않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보고 60~70년대 갱스터 영화의 향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준모 씨네리와인드 기자의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낙원의 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