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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건 전자랜드, 0%의 기적을 꿈꾸다

[주장] 놀라운 집중력으로 기사회생, 전자랜드의 간절한 도전

21.04.26 10:02최종업데이트21.04.2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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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프로농구 인천 전자랜드가 벼랑 끝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투혼을 보여주며 아직 못다한 우승의 꿈을 향한 '라스트 댄스'를 이어가고 있다.

전자랜드는 정규리그 1위 전주 KCC와의 '2020~2021 현대모비스 프로농구 4강 플레이오프'에서 1승 2패로 열세에 놓여있다. 전주 원정에서 내리 2연패를 당한 전자랜드는 25일 인천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3차전이 어쩌면 시즌 마지막 경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자랜드는 홈경기에서 선수단 전원이 똘똘 뭉쳐 놀라운 집중력을 과시하며 112대 67이라는 뜻밖의 대승으로 기사회생했다.

전자랜드에게 이날 승리는 단순한 1승을 넘어 프로농구에 또 하나의 '역사'를 남겼다. 45점차는 역대 플레이오프 한 경기 최다 점수차 신기록이었다. 종전 기록은 전창진 KCC 감독이 원주 TG삼보(현 DB) 사령탑 시절인 2004-05시즌 서울 삼성과의 4강 플레이오프에서 기록했던 42점차(105-62)였다. 전자랜드는 전반에만 이미 57-26으로 크게 앞서며 일찌감치 승부를 갈랐는데 31점차 역시 역대 플레이오프 전반 최다 점수차 기록이다.

또한 전자랜드의 외국인 선수 조나단 모트리가 3차전에서 기록한 48득점은 제이슨 윌리포드(1998년·원주 나래)와 피트 마이클(2007년·고양 오리온)의 47점을 넘는 프로농구 역대 플레이오프 한 경기 최다 득점 신기록이었다. 모트리는 이날 3점슛 9개를 던져 6개를 성공시키는 등 내외곽을 가리지 않고 화끈한 득점포를 가동한 것은 물론 9개의 리바운드와 6개의 어시스트까지 추가하는 전천후 활약으로 팀의 대승을 이끌었다. 그간 라건아와의 대결에서 다소 밀리는 모습을 보여줬던 모트리지만, 3차전에서만큼은 전자랜드가 시즌 후반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플레이오프를 대비한 승부수로 영입했던 이유를 제대로 보여줬다.

플레이오프에서 한 팀이 세자릿수 득점을 넘기거나 점수차가 30-40점 이상 벌어지는 경우는 전력이 평준화된 현대농구에서 쉽게 보기 힘들었다. 정규리그 5위에 그친 전자랜드가 1위팀인 KCC를 상대로 이뤄낸 기록이라는 점에서 더 충격적이다.

한번만 더 지면 그대로 탈락하는 벼랑 끝에서 전자랜드 선수들은 초반부터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모트리가 활발한 득점포를 가동하며 KCC의 수비를 무너트린 가운데, 김낙현을 비롯한 국내 선수들은 한 발 더 뛰며 수비와 리바운드에서 악착같은 모습으로 주도권을 장악했다. 물론 경기가 안풀린 KCC가 다소 일찍 백기를 든 탓도 있지만, 하나로 뭉친 전자랜드가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를 증명한 장면이기도 하다.

전자랜드에게는 더 이상 내일이 없다. 모기업이 이미 올 시즌을 끝으로 구단 운영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된 상황이다. 전자랜드는 올 시즌 프로농구 샐러리캡(연봉총액상한제·25억원)의 60%(15억원)밖에 소모하지 않았고, 강상재의 군입대와 김지완의 이적 등으로 전력은 지난 시즌보다 오히려 약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미 지난달 2일 KBL이 공개입찰을 실시했고 시즌 종료 이후 새로운 인수 기업을 발표할 예정이다. 다행히 농구단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승되겠지만 적어도 더 이상 전자랜드라는 이름으로는 아니다.

전자랜드는 프로 원년 대우 제우스 시절부터 신세기 빅스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24년에 이르는 역사 동안 아직 정규리그-챔프전 우승 경험이 없다. 챔피언결정전도 2018-19시즌에야 딱 한번 올라 준우승에 그친 것이 전부다. 유도훈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2009년 이후 올 시즌까지 플레이오프 무대만 9번이나 밟으며 어엿한 '봄농구' 단골손님이 되었지만 우승의 꿈은 여전히 멀기만 했다. 그리고 올 시즌은 전자랜드라는 이름으로 우승에 도전할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절박함으로 뭉친 전자랜드는 6강 플레이오프에서 정규시즌 4위팀 고양 오리온을 3승 1패로 '업셋'하며 준결승에 올라왔다. 유도훈 감독 체제에서만 5번째 4강진출이다. 정규리그 우승팀 KCC를 상대로 전력상 열세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1,2차전에서 초반에 잘싸우고도 아쉬운 역전패를 당했다.

하지만 홈으로 돌아온 전자랜드 선수단에게는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부담보다는 '다시 시작'한다는 의지가 더 강했다. 3차전의 대승은 단지 시리즈를 한 경기 더 끌고 간다는 차원을 넘어, 1,2차전의 선전이 우연이 아니었고 어쩌면 승부를 뒤집을 수 있다는 희망을 되살렸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다.

물론 여전히 상황은 전자랜드에게 불리하다. 모든 데이터와 확률은 전자랜드의 승리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역대 프로농구 플레이오프에서 먼저 2연패를 당하고 3연승으로 시리즈를 뒤집은 사례는 전무하다. 1997-98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KCC의 전신인 대전 현대가 부산 기아(현 울산현대모비스)에 1,2차전을 내주고도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4승 3패로 역전우승을 차지한 사례가 딱 한번 있지만, '5전 3선승제'의 6강-4강 PO에서는 역스윕에 성공한 경우가 아직 없다.

전자랜드에게는 KCC와 5차전 징크스도 넘어야 한다. 전자랜드는 올 시즌 전까지 KCC를 플레이오프에서만 3번(2008-2009시즌 6강, 2010-2011시즌 4강, 2017-2018시즌 6강) 만났지만 단 한번도 이겨보지 못했다. 또한 유도훈 감독은 용산고 선배인 전창진 감독과의 플레이오프 맞대결에서 번번이 고개를 숙였다.

전자랜드가 KCC와의 시리즈를 뒤집으려면 이제 남은 4.5차전을 모두 이겨야 한다. 그런데 전자랜드는 지금까지 플레이오프 최종전인 5차전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다. 2008-2009시즌 KCC와 6강 플레이오프를 시작으로 2011-2012시즌과 2013-2014시즌 6강에서는 연달아 kt에 2승 3패로 졌다. 2014-2015시즌 4강에서는 원주 DB에게, 2016-17시즌 6강에서는 서울 삼성, 그리고 2017-18시즌 6강에서는 KCC에게 각각 5차전의 벽을 넘지 못하고 분루를 흘렸다.

좋게 말하면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지만, 우승에 목마른 전자랜드 입장에서는 통한의 역사이기도 했다. 당장 27일 4차전을 잡는다고 해도 5차전은 KCC의 홈코트인 전주에서 치러야 한다. 6강플레이오프부터 올라오느라 체력적 소모가 더 심하고 선수층도 얇은 전자랜드에게는 매순간이 여전히 첩첩산중이다.

전자랜드는 확률로 따지면 0%의 기적에 도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기록의 묘미는 깨지는 데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전자랜드가 3차전에서 플레이오프 역대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1위팀에 대승을 거두리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어쩌면 부상자 속출과 체력적인 부담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왔다는 자체가 전자랜드에게는 이미 기적의 연속이었다.

유도훈 감독은 마지막 시즌을 앞두고 출사표에서 '인생을 걸고 뛴다'라는 모토를 제시한 바 있다. 그리고 전자랜드는 지금까지 그 모토가 부끄럽지 않은 투혼을 보여주며 농구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아름다운 피날레를 꿈꾸는 전자랜드의 간절한 도전이 과연 또다른 기적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관심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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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전자랜드 라스트댄스 5차전징크스 인생을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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