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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지만 쿠바에서는 랍스터도 맛없다

[40대 백수가 얼떨결에 간 쿠바] 트리니다드의 뜨거운 밤

등록 2021.06.01 14:06수정 2021.06.01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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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19일부터 3월 1일까지 다녀온 쿠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행 직후 전세계적인 코로나19 확산으로 싣지 못했던 여행기를 1년을 맞아 공유하고자 합니다.[편집자말]
한국의 민박, 쿠바의 까사

트리니다드로 돌아와 우리 일행은 버스 안에서 2, 3명씩 짝을 지어 숙소를 배정받았다. 복불복이었는데 나의 룸메이트는 아바나에서부터 함께 다닌 북한산 산악구조대 형님이었다. 계속되는 술자리와 동행으로 이제는 아주 가까운 형님, 동생 사이가 되어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이미 마중 나온 까사 여성 주인이 우리를 반겨주며 명함을 건넸다. 혹시 손님이 길을 잃을까봐 까사의 주소와 전화번호, 지도까지 친절하게 박혀있었는데, 개인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그곳에 나란히 적혀 있는 두 부부의 이름이었다.

Anselmo Rodriguez y Anastasio Cardenas
 

까사의 명함 ⓒ 이희동

 
혹자에게는 당연할지도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생소한 남녀가 평등한 쿠바의 문화였다. 어쨌든 모든 인간의 평등을 전제로 시작된 공산주의지만, 여전히 많은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가부장제의 관습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북한이다. 비록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이후 여성들이 장마당에서 돈을 벌어오면서 많이 개선되었지만, 아직 북한은 남존여비가 심한 편이다. 공산주의란 이데올로기도 몇 백 년을 전해져 내려온 가부장의 관습 앞에선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쿠바에서는 젠더의 문제가 어떻게 발현되고 있을까? 
 

원색의 도시 트리니다드 ⓒ 이희동

   

트리니다드의 까사 내부 ⓒ 이희동

 
주인을 따라 도착한 까사는 트리니다드 시내 중앙에 위치한 깨끗한 2층 건물이었다. 우선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노랗고 파란 외관의 강렬한 벽 색깔이 눈에 띄었다. 시엔푸에고스의 건물들이 파스텔 톤이라면 이곳 트리니다드의 대부분 건물들은 강렬한 원색이었는데, 그것들이 오래된 돌길과 어울려 동화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자 남편이 나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심지어 집안에서 키우는 검은 강아지도 꼬리를 흔들어댔다. 전혀 어색하거나 낯설지 않은 모습. 한때 성행했던 우리 국내의 민박과 달리 자연스러웠다. 아마도 꽤 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이곳을 거쳐 갔기 때문이리라. 트리니다드가 여행의 도시라더니 역시.

방을 소개받은 우리는 짐을 풀고 그동안 들고 다니던 한국에서 가지고 온 공산품들을 꺼냈다. 여행 오기 전 쿠바에는 모든 물자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그들 살림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것들을 각자 가지고 온 것이다. 구조대 형님은 파스에서부터 시작해서 연고, 붕대 등등 온갖 것들을 까사 주인에게 주었고 그만큼 환대를 받았다. 아바나에서 들었듯이 쿠바에 비누나 세제가 부족한 걸 알았다면 좀 더 챙겼을 것을.


트리니다드의 노을
 

트리니다드의 기와 지붕 ⓒ 이희동

 
짐을 풀고 다시 모인 우리 일행이 향한 곳은 가이드가 소개하는 한 루프탑 카페였다. 말이 좋아 루프탑 카페지 그냥 평범한 카페의 옥상에 테이블 몇 개 가져다 놓은 수준이었지만, 워낙 위치가 좋아 소위 노을 '맛집'인 듯했다.

트리니다드는 우리의 바닷가 도시와 마찬가지로 산을 끼고 도심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중심지는 경사가 급해지기 전 완만한 구릉지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었고, 우리가 방문한 루프탑 카페는 그 중심지 한가운데에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캐리비안 베이의 노을과 함께 트리니다드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었다.

옥상에서 바라본 트리니다드는 또 다른 느낌의 도시였다. 밑의 거리에서는 알록달록한 집들의 원색이 인상적이었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니 모두 붉은색 점토의 기와를 얹어 통일된 느낌을 주는, 영락없는 유럽의 중세 도시였다. 
 

트리니다드의 노을 ⓒ 이희동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하자 전 도시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주황색의 기와는 빨갛게 되었고, 하얀 벽면은 황금색으로 변했다. 그것은 20년 전 유럽 배낭여행 때 방문했던 스페인의 옛 수도 톨레도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일몰과 함께 황금빛으로 빛나던 톨레도. 그 시대를 살았던 스페인 사람들이 넘어와 도시를 건설했으니 이곳도 당연히 비슷한 느낌이겠지.

트리니다드의 노을은 시엔푸에고스에서 봤던 그것과는 또 달랐다. 뭐랄까. 좀 더 황량한 느낌이었다. 시엔푸에고스의 바닷가에서는 노을을 보면서 같은 풍경을 봤을 400년 전 캐리비안의 해적을 떠올렸지만, 트리니다드에서는 18세기 번성하던 설탕무역이 끝나고 허물어져가는 도시를 보며 과거의 영광을 되새겼을 쿠바인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저 붉은 노을에 물든 아름다운 도심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과연 300년 뒤의 후손들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도시 덕분에 먹고 살게 될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어쩌면 관광은 가장 적극적인 역사의 발현이요, 과거와 현대의 만남인지도 모른다.

해가 지고 남반구의 낯선 별자리까지 확인한 뒤 루프탑에서 내려와 저녁을 먹으로 레스토랑에 들렀다. 트리니다드도 바닷가인지라 랍스타를 시켰다. 아무리 쿠바의 음식이 맛이 없기로서니 설마 랍스타까지 맛없을라고. 그러나 그것은 단단한 착각이었다. 무려 랍스타임에도 불구하고 맛은 기대 이하였다. 도대체 공산주의 쿠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마요르 광장의 살사 
 

해지기 전 마요르 광장 ⓒ 이희동

 
저녁을 먹은 후 숙소에 들어와 쉬고 있는데 옆방 형님들이 트리니다드의 첫 번째 밤을 이렇게 보낼 거냐고 부추기기 시작했다. 루프탑 카페를 올라가면서 가이드는 트리니다드의 중심지라는 마요르 광장을 소개시켜주었는데, 매일 밤 그곳에서는 많은 여행객들이 모여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고 했다.

드디어 어제 시엔푸에고스 호텔 로비에서 술에 취해 배운 살사의 실력을 보여줄 때가 된 것인가. 성화에 못이긴 척 형님들을 따라 나섰다. 그래도 쿠바에 왔는데 한 번쯤은 춤을 춰야지 않겠는가.

마요르 광장은 까사로부터 15분 정도 떨어진 구릉지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도시에는 이미 어둠이 내렸지만 거리는 여행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마요르 광장까지는 길옆으로 온갖 기념품 가게와 클럽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클럽은 보이는 곳마다 문전성시였다. 술을 마시고 춤을 추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 당시만 해도 동아시아는 코로나19로 비상이었지만, 쿠바에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딴 세상 이야기일 뿐이었다.

마요르 광장 도착. 일몰 때만 해도 비교적 한산했던 그곳은 어느새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광장은 계단과 매점, 넓은 무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한 손에는 럼주와 모히또를 들고 무대를 바라보는 계단과 의자에 앉아 적도의 뜨거운 밤을 즐기고 있었다. 한마디로 실외 클럽이었다. 
 

마요르 광장의 밤 ⓒ 이희동

 
사회자의 몇 마디 멘트가 끝나고 다시 음악이 흘러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백인, 흑인 할 것 없이 온갖 인종의 남녀노소가 섞여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었고, 그 중에는 우리의 현지 가이드도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유일하게 무대에 없는 인종은 아시아계 남자였다. 그 모든 건 자격지심일 뿐이라며 용기를 내어 무대에 나갈까도 싶었지만, 춤도 잘 못 출 뿐만 아니라 괜히 주눅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BTS가 세계적으로 대세인 이 시대에 아시아계 남성으로서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것이 내가 가진 한계였다. 과연 나는 쿠바에서 살사를 출 수 있을까? 열광적인 무도회장을 나와 까사로 오는 길, 나의 심장은 뜨겁게 뛰고 있었다.
#쿠바 #트리니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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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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