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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에서 '속도'를 떼었더니 나타난 색다른 볼거리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좀비크러쉬: 헤이리>

21.06.28 16:47최종업데이트21.06.28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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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크러쉬: 헤이리" 포스터 ⓒ 필름다빈

 
1_다시 조지 로메로를 호출하는 시간
 
어느새 대중문화의 주요 아이템 중 하나로 정착한 좀비 장르. 현대적 좀비물의 원조로 누구나 떠올릴 법한 영화는 역시나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The Night of Living Dead> (1968)이다. 사람들이 간과하지만 해당 작품은 저예산 독립영화의 기본요소를 모두 갖춘 영화다. 당대 사회풍자와 비판의식이 기본으로 깔린 데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정신을 구현한) 표현의 자유와 뿜어져 나오는 상상력, (예산과 투입자원의 한계로) 투박하고 거칠지만 이를 상쇄하는 창의적이고 재기 넘치는 연출과 시도들. 그 모든 요소가 함께 들어 있었던 로메로의 기념비적 시도는 이후 '시체 3부작'으로 연결되었다,
 
그 후 우리가 모두 알게 되었듯 반세기 동안 수많은 감독과 작품이 이를 추종해 장르 화되면서 좀비 영화는 숱한 가지로 뻗어나갔다. 저예산 장르물의 소재로 적극 활용되는 것을 넘어 어느덧 대자본이 투입된 블록버스터에서도 단골 배경이 되어간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로메로의 연작들이 정립했던 기본 법칙은 희미해지고, 스타일로서의 좀비만 과잉되어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상업영화 대작에서 좀비의 활용은 게임의 그것과 비슷하다. 원래 인간이었던 존재이지만 윤리적 판단이 필요 없이 마음껏 액션의 대상으로 써먹을 수 있는 존재다. 즉 주인공과 동료들에게는 공인된 학살면허의 객체인 셈이다. 이제 21세기 대중문화에서 좀비라는 상징은 조지 로메로의 느림보 좀비가 아니라 2004년 잭 스나이더 감독이 로메로의 시체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인 <시체들의 새벽 Dawn of the Dead> (1978)을 리메이크한 2004년 작품 <새벽의 저주>를 추종하게 되었다(잭 스나이더는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블록버스터 좀비 영화 <아미 오브 데드>를 다시 선보인 바 있다).

소위 '뛰는 좀비'를 확립한 영화다. 긴장감과 말초적 스릴은 이 영화 이후 극대화됐다. 상업 블록버스터가 좀비 장르를 적극 도입하게 된 배경 또한 이렇게 파워-업이 된 좀비 설정 덕분이다. 하지만 독립영화가 좀비를 다루는 방식은 본래 로메로가 시작했던 출발점에 가까울 때 진국이 나오는 법이다.
 
2_한국 독립영화의 좀비 활용법을 부활시키다
 

▲ "좀비크러쉬: 헤이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필름다빈

 
21세기 한국영화에서 좀비 소재의 활용 역시 독립영화들이 먼저 스타트를 끊었다. 2009년 옴니버스 독립장편 <이웃집 좀비>부터 출발해 단편 위주로 다양한 실험이 꾸준히 이어져왔다. 그 와중에 오랜만에 장편에서의 시도가 등장했다. <사돈의 팔촌> 등을 연출하고, 파주 헤이리에서 30석의 아담한 독립예술영화관 헤이리 시네마를 운영 중인 장현상 감독의 <좀비크러쉬: 헤이리>다. 저예산 장르 영화로 인식되고 있지만, 어느새 우리 뇌리를 장악한 게임 모드의 좀비 물과 비교해 본 영화는 꽤나 '차이 나는' 접근법을 택한다.
 
물론 하늘 아래 새로운 게 별로 없듯, <좀비크러쉬: 헤이리>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은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좀비의 발생원인은 봉준호 감독이 <괴물>에서 선보였던 한강 괴물을 연상시킨다(거기에 헤이리 동네의 기원을 천연덕스럽게 해설하는 것은 재미난 덤이다). 감독 자신이 헤이리 주민 일원으로서 로컬리티를 적극 활용하는 배경은, 서울의 강남/강북처럼 영국 런던에 존재하는 지역 색을 활용했던 <카크니즈 vs 좀비스 Cockneys vs Zombies> (2012)나 쿠바의 사회적 현실을 녹여낸 <후안 오브 더 데드 Juan of the Dead> (2011) 같은 선배 좀비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이야기 전개 스타일은 <새벽의 황당한 저주 Shaun of the Dead> (2004)와 닮아 있다.
 
즉 좀비물이라는 장르를 캔버스로 삼아 다양한 사회적 풍자와 장르적 재미를 채워 넣는 용도로 활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풍자적 요소가 적지 않게 들어가지만 <좀비크러쉬: 헤이리>는 사회비판을 본령으로 깊숙이 들어가기보다는 스탠딩 코미디 쇼의 터치처럼 치고 빠지며 활용하는 식이다. 정부 지원사업에 목매야 하는 문화예술인들, 위기가 터지면 이기적 속물근성을 드러내는 종교인과 한(국)남(자)들, 일단 좀비라면 죽이고 보자는 정부와 군대의 태도들 모두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미덕을 보인다.
 
3_할리우드 슈퍼 히어로 물과 차별화된 영웅 상
 
그 대신 영화는 차별화된 여성 영웅과 그녀들을 조력하는 남성 지원군의 활약을 큰 줄기로 삼아 이야기를 끝까지 밀고 나간다. 우리가 이미 내재적으로 학습한 히어로물의 법칙은 <좀비 크러쉬: 헤이리>에서 상당부분 비틀리고 변형된다.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세계관의 대표 히어로 중 하나인 스파이더맨의 명대사,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영화 속 캐릭터 '꾸물이'에 의해 패러디된다. "큰 책임에는 큰 힘이 따른다!"로. 이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관객에게 선사하는 '사실 같은 환상'에 대한 카운터펀치로 구사된다. 원래부터, 혹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절대능력을 확인한 영웅 캐릭터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개인들이 능력 밖의 일이지만 자신만 생각하지 않고 가족을, 이웃을, 그리고 사회를 구하기 위해 한계에 도전하는 '리틀 빅 히어로' 혹은 '시골 영웅'이 본 작품의 주인공들을 통해 유머러스하게 구현된다.
 
영화 속 '산드라'의 예지몽처럼 '빨강, 노랑, 파랑' 삼색의 영웅으로는 독립영화판을 넘어 상업영화와 드라마에서 왕성히 활약 중인, 독립영화에서 검증 다 마친 배우 공민정&이민지와 함께, 아이돌 그룹 걸스데이 출신의 박소진이 큰 무리 없이 삼인조로 조화를 이루어 활약한다. 헤이리 마을에 얽힌 비밀을 우연히 알게 된 '공진선'(공민정 분)은 사진 기억력과 먼저 공격은 못하고 순수 방어만 가능한 호신술의 대가 '민현아'(이민지 분), 자칭 마녀로 오가닉 제품을 자가 제조해 판매하는 '김가연'(박소진 분)과 팀을 이뤄 어떻게든 좀비가 된 이들을 (장르 영화적 클리셰와는 정반대로) 구하려 동분서주한다. 여기에 액션 스쿨에 다니는 초보 유튜버 '박민구'(조승구 분)와 주민들 중 거의 유일하게 제대로 도움이 되는 카페 주인 '김순기'(김준기 분)가 충실한 보좌역으로 조력한다.
 
반면에 막판 도착하는 군 특수부대를 제외한 공권력은 헛발질을 거듭하고 (사태 원인제공의 비밀도 포함해서) 동네 발전과 개발을 주도하던 공진선의 아빠를 포함한 평소 점잖던 주민들은 별 도움이 안 되거나 속물근성을 드러내기 일쑤다. 하지만 그것이 (극히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악마적 본성까지 가지는 않는다. 그저 평범한 소시민의 한계로 표현되는 게 영화의 매력이기도 하다.
 
영화가 보여주는 액션 장면은 좀비영화에 중독된 이들에게는 무척 심심해 보일지 모른다. 그래서 어느새 수백 수천의 압도적 좀비 군단에 포위된 주인공들의 사투를 상상하고 마는 관객들의 고정관념과 달리, 그런 대규모 스펙터클 활극과는 거리가 먼 영화 중후반 클라이맥스는 오히려 현실과의 접점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해준다. 당장 '고즈넉한 일요일 아침 우리 동네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 자신은 어떻게 할까'에 대한 현실 대응 매뉴얼 같다고나 할까. 그런 사실주의 경향이 적당한 유머와 만나면 나올법한 연출이다.
 
가볍고 허술한 점투성이로 보이다가도 조금 발상을 바꿔 생각해보면, <좀비크러쉬: 헤이리>의 이런 의도된 느슨한 액션 연출과 스토리 전개는 한국 독립영화가 어떤 태도로 사회적으로 굳어져버린 좀비 장르를 다뤄야 할지에 대한 꽤나 깊은 고민의 산물로 보인다. 좀비로 인한 대공포와 그 상황에 처한 인간군상의 민낯을 극대화하기보단, 코미디를 기반으로 하는 일종의 모험 성장 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소소하게 즐길 재미가 풍성한 작품이다.
 
조금 더 스토리 전개의 밀도가 올라갔더라면, 또는 찰나에 스쳐지나가는 캐릭터나 장치가 조금 더 유기적으로 활용되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운 요소들도 몇 있긴 하다. 그렇지만 달리는 좀비 속도에 대한 중독을 벗어나는 순간,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 다양한 색깔의 인디영화를 즐기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깔깔깔 웃으며 편안히 긴장 쫙 풀고 주말에 휴식처럼 볼 수 있는 영화다. 헤이리의 몇몇 랜드마크 공간들, 카메오로 등장한 숨은 인물 찾기 소소한 재미는 덤이다. 공포영화 무서워서 못 본다는 이들에겐 오랜만에 눈 안 가리고 볼만한 색다른 좀비물이 곧 극장에 도착한다.
 

▲ "좀비크러쉬: 헤이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필름다빈

 
<작품정보>

좀비크러쉬: 헤이리 Zombie Crush in Heyri
2020|한국|액션/코미디
2021.06.30. 개봉|119분|15세 관람가
감독 장현상
주연 공민정(공진선), 이민지(민현아), 박소진(김가연)
출연 조승구(박민구), 김준식(김순기)
제작 GATE6
배급 필름다빈
 
2020년 24회 부천 국제판타스틱영화제 코리안 판타스틱 장편 감독상,
배우상 심사위원 특별언급,
장편 배급지원상 수상작
좀비크러쉬: 헤이리 필름다빈 장현상 감독 공민정 배우 이민지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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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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