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히라(大平)일본외상과 회담하고 있는 김종필 중앙정보 부장(6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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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민들은 그런 식의 해법을 거부했다. 일본으로부터 받을 사과·배상을 논의해야 할 자리에서 일본으로부터 받을 경제협력을 함께 논의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일괄 타결 불가'가 1950, 1960년대 한국 국민들의 일반적 정서였기에 박정희 이전의 정부는 이런 방식을 시도하지 못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는 그랜드 바겐을 관철시켰고, 좋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식민지배 문제를 사실상 포기하는 선에서 약간의 경제협력으로 한일관계를 봉합하는 식으로 처리된 것이다. 두 문제에서 쌍방이 조금씩 양보하는 식으로 해결되지 않고, 과거사 문제에서 한국의 민족적 이익이 무시되는 방향으로 문제가 봉합된 것이다.
그 덕분에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해 한 마디의 사과와 배상 없이 약간의 지원금을 주는 방법으로 한일관계를 매듭지을 수 있었다. 덤으로, 한국을 종속적인 경제 시스템으로 끌어들이는 성과까지 거뒀다. 박정희 정부와 지지 세력은 민족적 자존심보다는 경제적 이익이 중요하다고 봤지만, 1965년 조약 및 협정은 일본의 민족적 자존심을 세워주는 쪽으로 귀결됐다.
당시의 국민들은 그랜드 바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국민들은 한일회담을 이끈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 부정적인 시선을 보냈다. 김종필은 '제2의 이완용'이라고 불렸다. 1964년 3월 28일 치 <경향신문> 기사 '어수선한 공항, 김종필씨 오는 날'에 등장하는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다.
낮 12시 10분경 서울 영등포공고생 7백 80명도 '누구를 위한 정치냐' '제2의 이완용을 추방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교문을 나서 김포 가도에서 시위한 후 시내로 향했다.
말로만 그랜드 바겐이었을 뿐이지 실제로 논의한 것은 경제협력에 불과했다. 식민지배를 포함한 과거사 문제는 제대로 논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의 김종필은 위안부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김종필 증언록> 제1권에서 그는 "조선인 위안부 문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슈지만 한일회담에서 거론되지 않았다"며 "위안부는 단 한번도 의제가 된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일괄 타결을 한다고 해놓고 핵심 문제들을 빠트렸던 것이다.
당시 국민들은 박정희 정부 자체에 대해서도 명확한 거부감을 표시하며 거국적 저항을 일으켰다. 1964년 6월 3일의 전국적 시위에서는 '박정희 하야' 구호도 등장했다. 박정희는 계엄령 발포로 강압적으로 상황을 억눌렀다.
불안의 씨앗

▲ 1962년 11월12일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 외무장관이 대일 청구권 문제를 타결지을 당시 작성된"김-오히라 메모"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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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태에서 1965년에 국교가 체결됐기 때문에 한일관계는 불안하게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까지도 한일관계가 불안정한 것은 바로 그 '그랜드 바겐'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괄 타결이라는 미명 하에 핵심 문제들을 미해결 상태로 방치했기 때문에, 한일관계는 더욱 혼란스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강제징용 판결,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일본 정부가 '이미 1965년에 해결됐다'고 말하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과거사 문제를 희생시켰을지라도 그 덕분에 경제협력을 받지 않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랜드 바겐 덕분에 실질적인 경제적 이익을 얻은 쪽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미국이 일본의 채무 부담을 덜어주는 대신에 일본이 한국에 경제협력 자금을 제공하고, 한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협력이 감소하는 대신에 일본이 한국에 경협 자금을 제공하는 일이 당시의 한미일 사이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논문 '한일회담과 청구권 문제의 해결 방식'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은 일본과의 전후(戰後)처리 과정에서 일본에 대한 미국의 GARIOA(점령지 구제기금) 원조 및 EROA(점령지 경제부흥자금) 원조에 대한 대미 채무변제를 끈질기게 요구했으며, 대미 채무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 문제는 일본이 동아시아에 대한 경제원조의 방식을 통해 일부를 변제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게 됐다. 결국 이 과정은 청구권 처리에 있어서 일본 정부가 경제협력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주요 계기가 됐다.
윤석열 전 총장이 높이 평가한 그랜드 바겐 방식은 박정희 정부와 일본 집권세력의 관계를 매끄럽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식민지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에 국민적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태가 수십년 누적되다 발생한 것이 2018년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과 2019년 일본의 경제보복이다.
지금의 한일관계는 그랜드 바겐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1965년에 그랜드 바겐을 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랜드 바겐을 시도하자는 윤석열의 주장은 한일관계를 한층 더 위험에 빠트리는 발언이다. 윤봉길 의사의 항일정신을 기리는 장소에서 언급할 만한 방안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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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제15회 임종국상.저서: 제도 밖의 권력, 영부인 리스크.아무도 몰랐던 독립운동 이야기,친일파의 굴욕,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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