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주산성의 동문 전경죽주산성의 사실상 정문 역할을 하는 동문은 현재 문루는 복원되지 않았지만 양옆의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다.
운민
그 길의 끝에 이미 문루는 불타고 없었지만 성벽과 문의 형태는 고스란히 남은 동문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비봉산의 능선을 따라 이어져 있는 성벽 안으로 들어서니 텅 빈 공터만 남아 쓸쓸함을 더해가는 듯했다.
아마 예전에는 몽골의 침략을 피해서 피난 온 백성들과 성을 사수하는 병사들로 가득 찼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던 중 몽골의 침략을 맞아 죽주산성에서 큰 공을 세운 송문주 사당의 안내판이 보인다. 우리에겐 아직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죽주산성을 언급하며 이 장군의 일대기를 짚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순 없다.
유난히 외침이 많았던 고려의 역사지만 그중에서 40년 동안 여섯 차례나 침입한 몽골의 침입은 가장 피해가 극심했고, 고통스러웠던 전쟁이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피해를 주었던 몽골은 고려 민중의 항쟁이라는 의외의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안성의 죽주 산성도 마찬가지였다. 그 중심에는 바로 송문주 장군이 있었다. 이미 몽골의 1차 침입 때, 박서 장군과 함께 귀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던 송문주 장군은 3차 침입 당시 죽주 근처에 몽골군이 들어오자 백성들을 산성으로 들어가게 한 뒤 결사항쟁을 펼칠 준비를 했다고 한다.
몽골은 처음엔 송문주 장군을 회유하려 했으나 오히려 성안의 군사를 출격하며 그의 굳건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몽골은 본격적으로 죽주산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비봉산을 의지하며 굳건히 지키고 있던 고려군을 공격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바로 포였다.
성의 사면을 공격하여 성문이 포에 맞아 무너질 정도로 위기였지만 성안의 군민은 혼란에 빠지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역시 포로서 몽골 군대의 침입에 대응했고, 적절한 타이밍에 성의 군사를 몰고 대응해 나가니 15일간의 전투에서 끝끝내 죽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송문주 장군은 귀주성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퇴한 경험을 살려 공격 방법을 예측하고 적절하게 대응함으로써 그들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그를 가리켜 신명(神明)이라 일컬었고, 지금도 산성에는 그의 사당이 남아있다.
그의 사당을 둘러보기 전에 성벽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오는 길에 들르기로 한다. 비록 세월이 수백 년 흐르긴 했지만 변함없이 굳건하게 이어져 있다. 성벽을 따라 오르는 트레킹 코스로도 인기가 많아 적잖은 사람들이 길을 따라 걷고 있는 광경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나도 동문에서 동쪽 능선을 따라 성벽을 걸어본다. 이제 여름으로 들어가는 시기인 만큼 풀은 발목까지 무성하게 자랐고, 성벽을 지키던 병사 대신 여치와 메뚜기들이 노닐고 있다. 날이 꽤 더웠지만 산 위에서 부는 바람이 온몸을 시원하게 적셔주었다. 성벽의 아래를 내려다보니 과연 천혜의 요새라 할 만큼 전망이 무척 훌륭했다.
어쩌면 이런 경치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이 산성을 찾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죽주산성의 하이라이트는 동쪽 성벽과 북쪽 성벽이 만나는 지점의 포루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풀로 덮인 평원이 나타나고, 범상치 않은 돌무더기의 포루와 어림잡아 몇 백 년 이상 되어 보이는 오동나무 한 그루만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