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투자로 벤츠를 산 후배를 보고 허무주의자가 됐습니다.

[투자의 민낯] 허무주의자 되기

검토 완료

남희한(raintouch)등록 2021.08.09 09:06
늦은 시간까지 잔업을 하고 집까지 태워 주겠다는 후배의 차를 탔다. 몇 달 전 구매한 벤츠는 날렵한 맵시를 자랑하며 회사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차문을 열었을 때, 문 아래로 떨어지는 벤츠 앰블럼 불빛은 늦은 밤 어둠을 밝히는 동시에 내 마음에 작은 그늘을 만들었다.
 

후배의 벤츠는 날렵함을 품어내고 있었다. ⓒ Pixabay

    
후배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해 온 도전적인 친구다. 언젠가 만난 그의 아내 역시 긍정적이고 아는 이 하나 없는 먼 타지로 내려올 결심을 할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다. 서울이 그리워 퇴사하는 직원들도 있는 것을 보면 서울을 등지고 내려왔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아무튼 이 둘의 긍정적이고 대범한 면이 코로나 국면에서 빛을 발했던 것 같다.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지만 제법 크게 투자했고 차를 바꿀 만큼 큰 수익을 거뒀다.
 
이제 이쯤에서 나는 조금씩 커져 가는 마음의 소리에 시달리게 된다.
 
'나는 뭐했지?', '노력해봐야 소용이 없네..'
 
저 앞에서 어서 오라며 손 흔드는 무엇이 보인다. 어렴풋이 '허무'라는 명찰이 보인다. 큰일 났다. 아.. 나는 이렇게 허무와 절친이 되어 허무주의자가 되고 마는가.

노력과 결과
 
이래선 안 된다. 이러다 보면 필시 이상한 결론에 다다르고 만다. '나는 뭘 한 거지?', '노력이 아무 짝에 쓸모가 없잖아!', '나는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 그러다 끝내 '나는 왜 사는 거지?' 까지는 아니지만 그 언저리까지 가고 만다. 그 무섭다는 허무감이다.
 
그간의 내 노력과 시간을 무가치하게 바라 볼 수밖에 없는 결과에 도달하면 참으로 허탈하다. 정말 난 무엇을 위해 그렇게 달려 왔던 걸까. 아.. 인정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이다. 눈앞에 버젓이 드러나 보이는 현실. 그렇게 현타는 찾아온다.
  

담보되지 않는 성공과 실패 ⓒ Pixabay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분명 노력했고 반성도 했고 갱생도 한 것 같은데, 왜 신들은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 것인가 말이다. 부처님, 하나님, 조상님, 모두에게 빌어서 혼선이 있었던 것인지 많은 것이 뒤죽박죽이다. 이뤄진 것은 없고 가까워지기는커녕 자꾸만 뒤로 밀려나는 느낌이다. 에고, 이런 시련이 점점 지겨워 진다 이제.
 
서둘러 벗어나야 한다. 이런 허무감을 방치하면 안 된다. 친해지면 두고두고 찾아 올 녀석이다. 그런데 자꾸 손 흔드는 저 허무와 가까워진다. 나는 어쩌면 좋을까. 그냥 콱 절친을 맺어 버릴까. 혹시 좋은 녀석일지도 모르지 않나.
 
그때였다. 어느새 집 앞에 다다른 후배가 내게 말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제야 내가 왜 이 늦은 밤까지 일을 하고 이 친구의 차를 탔는지 생각이 났다. 오늘 회사에서 이 친구는 눈물을 흘렸다. 잘해보려고 했던 작은 행동이 생각지 못한 큰 사고가 될 뻔한 탓에 마음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몇 시간 동안 지옥을 경험한 그는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천당으로 끌어올려 졌을 때, 후회와 안도와 감사의 눈물을 쏟아 냈다. 서른 살이 넘은 남자 사람의 눈물을 장례식장이 아닌 곳에선 처음 봤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에 적잖이 놀라고 당황했던 그의 한결 편안해진 표정을 보고 있자니, 세상 일 참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력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실수가 언제나 좋지 않는 결과로 귀결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목격하면서.
 
허무주의자 되기

허무'주의'자 되기 ⓒ 남희한

 
고백하자면 나는 그의 일이 내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최선을 다해 도우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선 안도의 한숨을 여러 번 쉬었다. 그 당시엔 그의 주식 투자 성공도 주차장에 있을 매끈한 벤츠도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안절부절 하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고 도와주고 있는 내가 참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천만다행으로 일이 잘 마무리되고 그의 차를 탔을 때,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 친구는 이래저래 운이 좋은 사람인데, 나는, 참 괜찮은 나란 사람은 어째서 그와 같은 운이 따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것은 부러움이었고 부러움은 곧 허무함으로 미끄러져 흘러갔다.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원했던 걸 내가 원하는 시점에 내가 원하는 만큼 가져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것이 내 노력의 부족함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체로 흡족하지 않았고 부족했으며 한참 늦었다.
 
경험적으로든 이론적으로든 원하는 결과를 이뤄내는 것은 애초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당연한 거였다. 그런 현실에서 노력하면 쟁취할 수 있을 거란 '희망'에 '실망'을 한다. "내가 들인 노력이 얼만데!!" 기회비용에 대한 자동반사적인 셈법이다. 이제 그만해야겠다. 자꾸 다시 셈해도 자꾸 틀린다. 노력의 결실이 언제나 성공일 수 없음을 확인할 뿐이다.
 
후배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다시 허무를 마주하니 좀 전엔 보지 못했던 빨간 경고판이 눈에 들어 왔다. "주의"라고 커다랗게 적혀 있는 경고판.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옆에 서 있는 '허무'는 반갑게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오만상을 쓰며 혼신을 다해 손을 내젓고 있었다. 이쪽이 아니라는 듯, 너는 절대 오지 말라는 듯이.
 
그럼 그렇지. 내가 허무와 절친이 될 리가 없다. 그러기엔 가진 것이 너무 많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친절함과 남을 부러워하는 부러움과 상대와 비교하는 시기심과 나도 꼭 해야겠다는 욕심이 그득한데 허무라니. 괜한 걱정이었다.
 
허무주의자가 될까 걱정했는데, 허무"주의"자가 됐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과속주의', '추락주의' 푯말처럼 어딘가 서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 글이 적당한 위치인지 모르겠다. 부디 모두의 허무함에 주의를 환길 시킬 수 있길 빈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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