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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에서 눈 뜨고 자는 아찔한 상황 겪어 보셨나요?"

[나의 꿈은 '노동자'입니다 20] 박성필 화물 운송 노동자

등록 2021.08.09 08:13수정 2021.08.09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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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지식인 혹은 스타들의 목소리만 넘쳐나는 속에서 진짜 이 사회의 주인인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살려내고자 합니다. 노동자 개인의 삶을 인터뷰하면서, 어릴 적 꿈과 직장을 구하는 과정, 일터에서의 보람, 힘든 점, 그리고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의식의 변화 등을 중심으로 진솔한 삶을 기록합니다.[기자말]

'우리 시대의 아빠들은 슈퍼맨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박성필씨. 20년째 화물 운송일을 하고 있는 그는 화물연대 전남지역본부 교섭국장이기도 하다. ⓒ 박성필

"우리 시대의 아빠들은 슈퍼맨이 되어야 해요. 무조건 돈을 벌어들여야 하니까요."

박성필(51)씨는 지난 7월 30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자신을 '20년째 화물 운송을 하는 두 자녀의 아빠'라고 소개했다.

"학창 시절 꿈이요? 솔직히 없었어요. 꿈이란 것도 내가 무언가를 보고 동경하는 게 있어야 생기는데, 그 시절 시골에선 무엇을 보고 동경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어요. 학교 다녀오면 무조건 밭에 가서 일하고, 산에 풀어놓은 소를 끌고 와야 했으니까요. 그때 제가 했던 생각이라곤 '이 시골 동네를 떠나고 싶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란 게 전부였어요." 

화물연대 전라남도 지역본부 교섭국장이기도 한 그는 전라남도 여수 화양면의 한 농가에서 나고 자랐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고향을 떠났어요. 처음 접한 곳이 그때 막 생기기 시작했던 광양제철산업단지였습니다. 지인을 통해 운 좋게 대우건설에 입사했어요. 창고 안전관리 요원으로 일해 보라 하더라고요. 공부하려고 안전관리 책자를 샀어요. 그런데 아예 시작도 할 수 없었어요. 한문으로 되어 있었거든요. 공부를 할 수 없었죠. 그때 '학창 시절을 바보같이 보내버렸구나' 하는 생각에 후회를 많이 했어요."

그곳을 나와 부산 신발공장이나 서울 용접공장 등 도시를 떠돌며 일하는 와중에도 미래를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때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광고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현수막이나 간판 작업도 컴퓨터가 아니라 붓을 사용해서 글씨를 쓰고 제작했어요. 그런 기술을 배웠어요. 일이 잘 되어 1996년도에 1인 사업장을 만들어서 시작했어요. 일이 많아졌을 때 한 사람을 더 고용했는데 오히려 더 힘들었죠. 고용한 파트너가 술 먹고 결근하거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연락이 두절되기도 해서 애를 많이 먹었어요.


2000년도에 첫 아이가 태어나고 나니,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굉장히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이 일을 계속해서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 있을지 걱정이 많이 됐어요."


19시간 화물 운송, 1년 만에 과로로 쓰러져

2002년 박성필씨는 2년간의 고민과 준비 끝에 화물 운송을 시작했다.

"땅을 임대해 조립식 건물을 세우는 사업을 했는데, 식구들을 위해 그곳에 투자하던 돈을 모두 회수해 화물 운송 일을 준비했어요. 이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주말에는 쉬고 해가 지면 끝나고 이런 줄 알았죠. 그런데 막상 해보니 죽을 맛이었어요."

오전 7시에 일을 시작해서 다음 날 오전 1시~2시에 마치는 날이 계속됐다. 당일 나온 물량을 다 소화해야만 일이 끝나는 구조였다. 하루 물량 1000개가 나오면, 50~60대의 차량이 그 1000개를 다 소화해야 그날 일을 마무리 짓고 비로소 귀가할 수 있었다. 제대로 쉴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는 무리가 따르는 장시간 노동이었다.

컨테이너 부두에 도착하자마자 하차 장비가 올 때까지 차량에 앉아 대기하는 시간은 쉬는 시간이 아니다. 졸거나 긴장을 풀면 하차 장비가 도착했을 때를 놓칠 수 있어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장비가 왔는데도 못 보고 하차를 안 하면, 뒤차도 일을 못 해서 남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게 된다. 융자를 포함해 시작한 운송 일의 초기 투자 비용은 7000~8000만 원, 당시 아파트 한 채 값에 해당했기에 어렵게 시작한 일을 접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만 1년을 보내고 그는 과로로 간수치가 올라 쓰러졌고, 한 달 반을 입원해야 했다.

"그래도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는 존재인가 봐요. 처음에 그렇게 못 견딜 것 같았던 것이 자꾸 하다 보니 가능해집니다."

2000년대 초 화물연대가 조직되었고, 몇 해가 지나면서 화물 노동자들의 안전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화되었다. 그렇게 일터의 조건과 운송료 처우가 조금씩 나아졌다. 그러던 2008년, 여수지역 노조가 와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운송 단가가 폭락했다. 박성필씨를 포함해 노조에 가입된 사람들 모두 블랙리스트에 올라 더 이상 여수산업단지에서 일할 수 없게 되었다.

"흔히 '찌꺼기'라고 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중장거리 시간찜(시간에 맞춰 도착해야 하는) 일인데, 오전 1~2시에 출발할 때도 있었어요. 눈이 와도 비가 와도 가야 하니 '내가 이 일을 왜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노조에는 가입되어 있었지만, 통장 잔고가 바닥이 나 조합비 미납으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몇 번이고 자동탈퇴 되기도 했어요."

안전운임제, 화물 노동자들의 희망
 

2018년 3월 화물연대가 오랫동안 주장해 왔던 안전운임제가 국회를 통과했고, 2020년 1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박성필씨는 안전운임제에서 화물 노동자들의 비전을 보았다고 했다. 화물연대가 2003년 '표준요율제'라는 명칭으로 주장했던 이 제도의 이름은 왜 '안전운임제'가 되었을까?

"눈을 뜨고 자본 적 있으세요? 저는 1~2km를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안 나는 아찔한 순간도 경험해 봤어요. 안전운임제는 화물 노동자의 과로, 과속, 과적 운행을 방지하고, 교통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운임을 보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화물자동차 화물연대, 운송사, 화주, 공익(정부 대표)가 참여하는 안전운임 협의체에서 '안전운임'을 결정합니다."

IMF 외환위기 이전에 운송사에 직고용되어 있던 화물 노동자들은 2000년대 이후 1인 사업자 신분으로 운송사와 계약을 맺어 일하게 되었다. 운송사들은 차량구입비, 수리비, 유류비 등 지출을 줄이고, 사고 발생 시 책임 부담도 덜기 위해 고용 형태를 변화시켰다. 당연히 이런 변화는 화물 노동자들을 열악한 상황으로 내몰았다.

이런 구조 속에서 노동자에게 돌아오는 운송료가 터무니없이 줄어들었고, 수익은커녕 빚만 늘어나는 경우도 발생했다. 운송업체는 대형 화주로부터 화물 운송을 의뢰받는데, 1차 운송업체는 자신들이 소화할 수 있는 물량보다 많게는 3배의 물량을 받는다. 나머지 물량을 2차 업체에 넘기고, 다시 2차는 3차로, 많게는 4차까지 가게 된다. 그러는 동안 각 단계의 운송업체들이 계속 수수료를 떼기 때문에 마지막에 차주인 화물 노동자에게 돌아오는 운송료는 형편없이 줄어든다.

이 때문에 차주인 화물 노동자들은 생계를 이어가고, 차량 할부금 등 빚을 갚기 위해 무리한 운행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안전운임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화물 노동자의 운송료의 최저한도를 정하도록 한 제도이다.

안전운임제가 시행되었다고는 하지만, 오랜 관행이 하루아침에 바뀌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차주인 화물노동자 개인이 '안전운임'을 주장하기 힘든 구조라는 문제가 있다.

"국토부에서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놓아도 노동자의 움직임 없이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잖아요."

박성필씨는 이 제도가 시행된 2020년 1월부터 1년 반 동안 수입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시간을 쪼개어 전남지역 화물 노동자들을 만나 설득했다. 처음 47명밖에 안 되던 이 지역 화물연대 조합원 수가 이 기간 500여 명으로 늘어나는 데는 그의 노력도 한몫했다.

편견 넘고 연대 통해 회복하는 노동자의 안전한 삶
 

지난 4월 29일 안전운임제 사수를 위한 화물연대 전남지역본부 경고파업에 참여한 박성필씨. 안전운임제 시행으로 운임이 인상된 만큼 노동시간을 줄여 노동자의 휴식과 수면 시간을 조금이나마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 박성필

   
지난 5월 26일 쌍용 C&B 조치원공장에서 하차 작업을 위해 컨테이너 문을 여는 순간 쏟아진 파지더미에 깔려 숨진 화물운전 노동자 고 장창우씨의 산재 인정을 위해서도 박성필씨와 조합원들은 연대했다.

"전남에서 세종시 조치원까지 교통비를 개인 부담해서 승용차로 이동해 원정 파업을 했어요. 그때 파업에 참여했던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첫날 200명이었고, 이틀부턴 두 배로 늘어났어요. 7일간 조합원들이 고생한 뒤에 결국 회사가 책임을 인정했고, 사고 발생 두 달이 넘은 7월 28일 산재 판결이 났습니다."

박씨는 과거 전남 지역에서 유사한 사망사고가 있었던 일을 회고했다. 그때 사망한 노동자가 조합원이 아니었고, 노조 역시 도움을 주지 못해 산재 판결을 받지 못했던 일을 안타까워했다.

"그때 뼈아팠던 건 차주인 화물 노동자들이 사측에 유리한 증언을 했던 겁니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두 번 죽이는 형국이었어요. 그 기억이 있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제겐 더 강했어요. 유가족을 위해, 또 우리 화물 노동자들에게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사후 처리가 제대로 되도록 선례를 남기는 게 중요하니까요."

화물노동자들이 그토록 바라던 안전운임제가 시행된 시점에 하필이면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수송 물량이 전체적으로 절반 정도로 감소했다.

"안전운임제 때문에 버티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아니었으면 화물 노동자들은 정말 먹고살기 힘들었을 겁니다. 임금 부분에서 넉넉해진 것은 피부로 느낄 수 없지만, 인권 면에서는 좀 나아졌다고 할 수 있어요. 제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만 해도 운송사에서 배차 정보를 담당하는 젊은 직원들이 50대, 60대 화물 노동자들에게 욕을 하며 그만두라고 협박하는 일이 있었어요.

그러던 것이 2008년 화물연대 조직이 확대되면서 50% 정도는 개선됐고, 이번 '안전운임제'를 시행하면서 완전히 없어졌어요. 운송사와 차주는 명목상 개인 사업자로 계약관계인데, 노동자를 낮춰보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 그동안 이런 부당한 취급을 받아 왔던 거죠."


화물 노동자들이 조합을 통해 연대하면서 노동 조건은 조금씩 나아졌다. 특히 안전운임제라는 제도를 정착시킨 것은, 비록 3년 기한의 일몰제라는 한계가 있지만 큰 의미를 지닌다. 박성필씨는 이제 일주일에 하루는 쉰다. 공휴일에 일하게 되면 할증된 운임을 지불해야 하기에 운송사에서 일을 맡기지 않는다. 오전 7시에 일을 시작하는 것은 같지만 일주일에 이틀만 다음 날 오전 1~2시까지 일하고, 나머지 날들은 당일 오후 7~8시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와 늦은 저녁을 할 수 있다.

"보람이요? 화물 노동자들을 '대한민국의 혈관'이라고 하잖아요? 물류가 움직이면서 한국 경제가 흘러간다고요. 그렇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일과를 마치고 안전하게 집에 돌아가는 것을 보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일 시작하고 4~5년 정도는 아내가 새벽까지 잠을 못 자고 저를 기다렸어요. 졸다가 사고 나지나 않을까 하고 말이죠. 이건 화물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기도 하고요. 화물차 관련 사고가 잦았잖아요? 소박하지만 건강하게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게 제겐 가장 중요해요."


그는 자신이 현실의 문제점으로부터 도망치고 타협하게 되는 게 가장 두렵다고 했다.

"제가 초중고 시절에는 뉴스에 나오는 얘기만 듣고 저도 '노동자'란 말을 '빨갱이'와 비슷하게 생각했어요. 그때 시위하는 대학생들 보며 부모들이 고생해서 고구마 팔아 학비 대주니 저러고 있다고 욕하고, 노동자들 파업하는 거 보고도 비슷하게 비난했죠. 그런 생각에 익숙했어요.

그런데 제가 사회에 나와서 실제 겪어보니 저 자신이 180도 바뀌었어요. 한국 사회도 이제 노동 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많이 바뀌고 있고요. 생각보다는 많은 분이 응원해주십니다. 이제는 저도 그런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한국 사회는 '노동'이란 단어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견이 퍼져 있어요. 노동자들을 비난하는 분들도 큰 맥락에서는 노동자인데 말이죠."
#화물연대 #안전운임제 #화물연대 전남지역본부 #화물 운송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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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여 년의 교직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 절망과 섬세한 고민, 대안을 담은<경쟁의 늪에서 학교를 인양하라(지식과감성)>를 썼으며, 노동 인권, 공교육, 미혼부모, 입양 등의 관심사에 대한 기사를 주로 쓰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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