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타나카 켄지 소좌와 모리 다케시 근위사단장 쿠데타를 주도하였던 하타나카 소좌(왼쪽)는 모리 사단장(오른쪽)으로부터 협조를 얻지 못하자 그를 살해하고 사단장 명령을 위조하여 군을 움직였다.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쿠데타 주동자들은 끈질기게 모리 사단장을 채근했다. 그러나 쿠데타에 찬동할 생각이 없었던 모리 사단장은 완고했다. 이 시점에서 이들을 체포하거나 제압하기라도 했다면 좋았겠지만, 쿠데타 세력을 동정했던 모리 사단장은 그저 '말 돌리기'로 시간만 끌었다.
천황의 항복선언 방송 막으려 상관까지 살해... 급박하게 진행된 쿠데타
그 관대함이 결국 비극을 초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리 사단장이 끝내 말을 듣지 않자 쿠데타 주동자 중 한사람이었던 하타나카 켄지(畑中健二) 소좌는 권총을 뽑아 들고는 그를 쐈다. 사단장과 참모를 현장에서 살해한 그들은, 사단장의 명령을 위조해 근위사단에 출동을 명했다. 8월 15일 새벽은 그렇게 급박하게 흘러갔다.
위조명령을 받은 근위사단 병력들은 완전무장을 하고서 궁성의 주요 구획들과 출입구, 항복 방송이 실시될 일본방송협회(NHK)를 점거했다. 쇼와 천황의 육성을 녹음한 항복 선언 레코드를 찾아 쿠데타군은 이곳 저곳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항복선언 레코드판은 끝내 나오지 않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쿠데타군 내부에도 균열이 생겼다.
영문도 모르고 동원된 근위사단 병력들은, 처음에는 미군이 상륙해 궁성으로 진격해오는 상황을 상상했다가 이내 무엇인가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군대가 들어갈 수 없는 구획까지 자신들이 범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고, 황궁경찰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해야 하는 것도 납득할 수가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8월 15일 아침이 되자 사단장은 살해됐으며, 출동명령은 위조였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병사들은 경악했다. 쿠데타 주동자들은 순식간에 통제력을 잃었다.
쿠데타에 실패한 주동자들은, 항복선언문이 방송되기 1시간 전에 궁성 앞에서 권총자살했다. 항복을 막기 위해 나섰던 과격파 장교들의 마지막 발악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1931년 만주사변 이래 15년 간 계속돼 온 일본의 전쟁은, 마지막까지 폭력과 피로 점철된 채 그렇게 겨우 끝을 맺게 된 것이다.
1945년 8월에 벌어진 이 난리의 중심에는, 항상 '천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미 310만의 국민이 전쟁으로 희생된 시점이었지만, 항복 논의에 있어 국민의 안위는 단 한 번도 고려되지 않았다. 항복파와 항전파를 막론하고 오직 천황제 유지 가능 여부에 대해서만 핏대를 세웠을 뿐이다.
즉, 천황 한 사람의 존재가 '일억 국민'의 생명보다도 우선된 셈이다. 당시의 제국 일본은 그런 나라였다. 국민의 일본이 아닌, 천황의 일본이었다.
그렇기에, 패전국 일본에게 있어, 숱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1945년 8월 15일에 내포된 '해방'의 의미는 결코 지울 수 없다. 패전으로 새롭게 태어난 나라는, 적어도 천황을 국체의 근간으로 삼는 나라가 아니었다.
이때의 환난을 통해 일본에는 자유와 인권이라는 가치가 처음으로 뿌리내릴 수 있었다. 사람들은 치안유지법의 굴레, 특별고등경찰과 헌병대의 탄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제 그들은 천황을 위해 죽어야 하는 신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근위사단 소속으로 쿠데타에 동원되었던 고쿠보 후쿠지 씨의 증언(2010년) "천황 폐하가 타신 말 앞에서 죽는 것을 명예로 믿었습니다. 소학교 때부터 체화해왔던 충군애국의 마음, 거기에 근위사단에 입대하고부터 받았던, '천황교'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교육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그러나, 결사항전을 주장하고 쿠데타까지 불사하던 군부 과격파의 존재는 또다른 의미로 천황의 신화를 덧칠하는 결과를 낳았다. 즉, 군에서 독단적으로 전쟁을 계속하려던 상황에서 '천황폐하가 성단을 내려주신' 덕에 겨우 종전이 가능했다는 논리, 바꿔 말하자면 천황의 결단으로 일본 민족이 파멸에서 구원 받았다는 역사관이다.
육해군의 대원수이자 제국 일본의 유일한 주권자였던 천황의 전쟁 책임은 그렇게 희석됐다. 전후 일본을 접수한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천황을 문책하지 않고 그 지위를 보장했다. 전쟁의 책임은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총리를 위시한 군부 독재자들에게만 돌아갔다.
일본 내에서 그 누구보다도 전쟁 진행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 누구보다도 영향력이 있었던 쇼와 천황이 추궁을 면했다는 것은 중대한 함의를 갖는다. 1945년 8월의 패전으로 일본은 과거의 제국시대와 단절되어 새로운 '자유민주' 질서를 구축하게 됐지만, 쇼와 천황이 책임을 면하고 지위를 보전하게 됨으로써 제국과 전쟁의 그림자는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 야스쿠니 신사는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몰자를 안치하는 시설로, 제국 시대의 천황 우상화와 전시동원에 있어 사상적 충추로 기능하였다.
박광홍
천황이 전쟁 책임을 회피함에 따라, 옛 전쟁에서 일본 국민들이 천황의 이름으로 강요 받았던 희생을 어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마침표를 찍지 못한 채 방치돼왔다. 그리고 청산되지 못한 제국의 그늘 아래, 천황을 위한 죽음을 찬미하는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 그리고 야스쿠니 같은 국가주의적 장치를 이용해 지지를 구하는 정치세력의 존재는 여전히 건재하다.
제국 체제에서 해방된 일본은, 그렇게 제국의 멍에를 내려놓지 못하게 됐다.
'국체 보전' 즉 천황제 유지를 위한 1945년 제국 지도부의 노력은, 이렇게 결실을 맺었다. 얄궂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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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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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억 국민 쓰러져도..." 일본 군인이 지키고자 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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