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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뭉쳐야' 끝나고 딱 15분, 우리 가족이 하는 일

3월부터 시작한 온가족 책읽기... 가족을 가족답게 만드는 작은 의식

등록 2021.08.15 19:17수정 2021.08.15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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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일요일 오후 9시 40분. 스포츠 예능프로그램 <뭉쳐야 찬다2>가 끝나는 시간(3월부터 최근까지는 <뭉쳐야 쏜다>였다). 아이는 TV 전원을 끄고 거실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골라 남편과 안방으로 들어왔다. 나도 보고 있던 노트북을 덮고 책을 꺼내놓은 뒤 휴대폰 타이머로 15분을 맞추어 놓았다. 올해 3월부터 우리 가족은 매주 일요일 밤마다 한 공간에 모여 책을 읽는다.


아이와 남편은 침대 위에 나란히 엎드려 책을 펼쳤다. 아이는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왕도둑 호첸플로츠>를 읽었다. 책은 무조건 재밌어야 한다는 아홉 살 아이는 오늘도 자기 입맛에 맞는 책을 골라 깔깔거리며 책장을 넘겼다.

일주일에 한번 15분 책읽기
 

'온가족 책읽기' 시간에 읽은 책입니다. ⓒ 진혜련

 
남편은 항상 그렇듯 나에게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여 그것을 읽는다. 오늘 내가 건넨 책은 <별것 아닌 선의>였다. 남편은 책날개에 써진 작가 소개부터 천천히 읽어나갔다. 나는 두 남자로 꽉 찬 침대를 뒤로하고, 내 책상 앞에 앉아 오래전 읽었던 <달과 6펜스>를 다시 읽었다. 읽다가 좋은 부분이 나오면 밑줄을 쭉쭉 긋고 책 귀퉁이를 접었다.

'삐 비비빅-' 알람이 울렸다. 온가족 책읽기 시간은 단 15분이다. 물론 이 짧은 시간 동안 책 한 권을 다 읽을 수는 없다. 하지만 10장 내외 정도는 읽는다. 신기하게도 딱 15분만 읽자고 정해놓으면 그 어느 때보다 책이 잘 읽힌다. 아예 읽지 않는 것과 조금이라도 읽는 것, 혼자 읽는 것과 온가족이 함께 모여 읽는 것, 이것은 작지 않은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믿는다.

알람이 울렸지만 모두 책에서 선뜻 눈을 떼지 않았다. 5분쯤 더 지나서야 아이가 말했다.

"엄마, 저부터 얘기할까요?"


우리는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다. 책을 읽고 난 뒤 대뜸 생각과 느낌을 말해보라고 하면 무엇을 말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그보다 책에서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나 문장을 말하자고 하면 훨씬 쉬워진다. 우리는 그렇게 책 이야기를 풀어간다.

"호첸플로츠가 훔친 물건 중에 제가 감탄했던 게 있어요. 노래가 나오는 커피 기계에요. 내가 그걸 가지면 어떨까 상상해봤어요."
"우와. 커피에 음악도 담아주는 거네. 멋지다!"
"그거 생기면 아빠도 한 잔 타주라."


우리의 책 이야기는 이런 식이었다. 책을 읽고 그럴듯한 독서 토론을 하는 게 아니라 책에 나온 내용을 가지고 미주알고주알 수다를 떤다.

"엄마가 읽은 책은 실제 작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소설이야. 고갱이라고. 가만, 그러고 보니 너 아기 때 처음 갔던 전시가 고갱 전시였다. 여보 기억나요? 얘 힙시트에 안아서 서울시립미술관에 갔었잖아요."
"응. 맞다. 너 고갱 그림 봤었어.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그 작품도 봤어."
"진짜요?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아마 즐겁게 봤을 거예요."


이렇게 책을 매개로 얘기하다 보면 이야깃거리가 풍성해져 우리의 추억을 떠오르게 하기도 했다. 월요일을 코앞에 둔 심란한 일요일 밤이었지만 우리는 추억을 말하며 마음의 여유를 가졌다.

우리의 수다는 계속 이어졌다.

"이제 아빠 차례에요."
"아빠는 책에서 이 문장이 좋았어. 성냥팔이 소녀가 켠 성냥처럼 지속 가능하지 못한 찰나적 온기에 불과할지언정 별것 아닌 순간들의 온기가 우리의 매일에 '하나 더' 주어지면 좋겠다."
"여보. 나도 그 문장이 좋아서 밑줄 그었잖아요. 이 작가 글 너무 좋지 않아요? 이 책 읽으면 작은 거라도 착한 행동을 하면서 살고 싶어진다니까요."
"아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공기요? 공기가 생긴다고요?"(아이는 '온기'라는 단어를 '공기'라고 들었다)


아이의 질문에 우리는 '온기'가 무엇인지, 우리 각자 따뜻함을 느낄 때는 언제인지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가족을 가족답게 만들어주는 시간

'온가족 책읽기'를 처음 시작하게 된 것은 아이가 좀 더 책을 가까이하고 좋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한 주 두 주 하다 보니 온가족 책읽기는 어느새 우리 가족만의 단단한 약속이 되었다.

우리는 싸우거나 혼나거나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도 변함없이 일요일 밤이면 함께 책을 읽었다. 누구 한 사람 오늘은 못 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온가족 책읽기를 하고 나면 속상하고 서운했던 마음이 저절로 누그러졌다. 이제는 어떤 목적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 가족이 함께하는 이 시간 자체가 좋아서 하고 있다.

얼마 전 나는 사샤 세이건이 쓴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라는 책을 읽고, 우리가 매주 하는 '온가족 책읽기'가 우리 가족만의 의식(ritual)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작가는 한 주의 의식을 통해 삶의 패턴이 생기고 공동체와 나 자신을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했다. 토요일 아침마다 가족과 함께 노래를 부른다는 작가는 이런 의식이 가족 간의 헌신과 기쁨을 정기적으로 재확인하는 절차가 되어 준다고 말했다.
 

아이가 그린 우리 가족 생활 모습입니다. ⓒ 진혜련

 
하루는 아이가 '우리 가족생활 모습 그리기' 숙제를 하고 있었다. 무엇을 그렸을까 궁금해 들여다보니 아이는 우리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책 읽는 장면을 그렸다. 아기자기하게 정다운 모습으로 그려 놓은 것을 보며 온가족 책읽기가 아이에게 즐거움과 든든함을 주고 있는 것 같아 미소가 지어졌다.

매일도 아니고 일주일에 한 번이다. 1시간도 아니고 15분이다. 가족이 함께 모여 책을 읽고 가벼운 수다를 떠는 것. 나는 감히 이 작은 의식이 가족을 가족답게 만들어주는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이는 문득문득 책을 보다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면 웃음을 한가득 머금고 다가와 종알종알 이야기해준다. 남편은 '<코스모스>를 한번 읽어 볼까'라는 내 말 한 마디에 그 책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신이 나서 말한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일상 속 작은 의식으로 조금 더 나아지고 있었다.
#가족 #책읽기 #리추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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