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우먼 아내가 이상형을 바꾸라고 했다.

[마흔이 서글퍼지지 않도록] 당당한 아내를 위한 응원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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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희한(raintouch)등록 2021.09.28 11:06
유연근무를 시작하고 9시 출근을 만끽하고 있다. 걸어서 20분 거리의 통근 길을 혼자 유유자적 걷는 것은 출근 필(feel)이라기 보단 산보의 느낌이 더 강하다. 바쁘게 걷는 회사 사람들의 발걸음에 따라 덩달아 피치를 올리다보면 회사에 도달할 때쯤 일찌감치 지쳤던 심신도 한결 편안해졌다.
 
모두가 일하는 틈에 느지막이 도착한 나는 마치 늦게 출근해도 되는 특권을 누리는 느낌도 만끽한다. 그에 따라 늦게 퇴근해야 하지만 아침의 여유에서 오는 사치스러움은 자못 매력적이다.
 
9시 출근의 또 하나의 이점은 가족과 함께 아침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요 근래 보장할 수 없었던 저녁 시간을 대신한 아침 시간은 꽤나 유용했다. '오늘 일찍 올게요'라는 말이 번번이 어겨지고 '이따 연락할게요.'라고 바뀐 이후로 아침 시간은 더욱 소중한 시간이 되고 있다. 그리고 아내의 진가를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침 풍경과 원더우먼 아내  

아내는 매일 아침 다양한 버전의 원더우먼이 된다. ⓒ Pixabay

 
아침에 아이들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침대를 기어 내려와 허물을 벗듯 옷을 벗고 외출복으로 쏙 들어가는 모습은 매일 아침 보아도 신기하다.
 
우선 두 딸은 학교 가자는 엄마의 속삭임에 반쯤 감은 눈을 부비며 침대에서 내려온다. 어떤 의무감에 의해 힘을 내어 다리를 움직이지만 문지방을 넘는 순간 마법이 풀렸는지 전원을 끈 행사장 풍선처럼 그대로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그리고 기기 시작한다. 각자의 1차 목적지에 다다르면, 첫째는 멍하니 앉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잠깐의 일을 복기하는 모습이고 둘째는 그대로 드러누워 팔을 위로 뻗고 눈을 감아 버린다. 정지 상태의 두 딸. 복기를 끝낸 첫째가 세상 느린 손놀림으로 환복을 시작하고 둘째의 호흡은 세상 편안한 템포로 바뀌어 간다.
 
눈앞에 뭔가가 휙 하고 지나간다. 위아래로 뻗은 둘째의 몸에서 간밤의 허물이 벗겨지고 꺼내놓은 외출복이 입혀진다. 비호같은 몸 놀림의 주인공은 아내. 아이와 실랑이 할 시간도 아까운 아내는 그냥 이 상황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그래도 '이제' 안 우는 것만 해도 어디냐며.
 
옷을 갈아입고 아침을 먹기 시작하면 두 아들이 방문을 배꼼 열고 밖을 살핀다. 아직 세상 빛을 많이 경험하지 못한 탓인지 눈이 부시다며 쉽사리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무슨 동면했던 곰돌이 같다. 매일 아침이 눈부신 봄맞이다.
 
환하게 주방을 밝혔던 등이 꺼진다. 역시나 비호의 몸놀림을 가진 아내다. 다그칠 시간도 아까운 아내는 어떤 시스템적 루틴으로 모든 것을 자동으로 해내고 만다. 그 와중에 귀여워마지 않는 곰돌이들을 안고 바닥을 나뒹구는 여유까지 즐기는 아내는 언제 그러고 있었냐는 듯 어느새 또 주방에 선다. 아내가 지나간 자리에는 벗겨진 내복과 외출복이 입혀진 아이들이 남는다.
 
이제는 모두가 사회생활(?)을 하는 탓인지 제각각의 스타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누릉지를 아침으로 생각한 아내와는 다르게 둘째는 아메리칸 스타일로 시리얼을 먹고 싶어 하고 셋째는 코리안 스타일의 밥과 국을 요구한다. 별 의견이 없던 넷째는 시리얼을 요구하는 한 편 우유는 컵에 따로 달라고 한다. 따로 국밥을 차용한 신개념 퓨전 아메리칸 스타일이다.
 
역시나 대단한 것은 아내다. 이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 주고야 만다. "통일 좀 시키자." 강요라고는 1도 없는 말과 함께 고객의 요구사항을 100% 만족시키기 위한 아내의 노력은 가히 감동적이다. '잘 먹으면 됐지'라는 마음아래 자신의 번거로움 쯤은 그냥 눌러 버린다.    

부지런히 움직이며 시선은 가족을 향한 아내 ⓒ Pixabay

  이런 아내의 노고를 줄이려면 나라도 그들 중 하나를 따라야 할 텐데, 누룽지를 먹으며 김치를 찾고 샐러드도 먹고 마는 나다. 어째서 냉장고를 열고도 눈앞의 김치를 찾지 못하는 것인지, 결국엔 냉장고의 경고음이 울리고 아내가 스쳐간 내 손엔 샐러드와 김치가 들려있다.
 
그렇게 아침을 먹고 있으면 아내는 딸아이들의 머리를 단장해준다. 그냥 질끈 묶어 주면 될 것을 또 고객들의 요구사항을 수렴하기 시작한다. 땋은 머리, 올린 머리, 엘사 머리, 벨 머리. 그런 요구사항이 접수되면 메두사를 방불케 했던 머리들이 공주 머리가 된다.
 
자신을 아낄 줄 아는 아내
 
밥을 먹던 나는 공주로 변신한 아이들의 모습에 그만 홀딱 빠지고 만다. 커다랗고 서글서글한 눈을 깜박이며 오물오물 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그런 미소를 보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도도한 모습에 미소 짓던 입이 헤벌레 벌어진다. 메두사 머리에도 반해있던 아빠라는 사람의 자연스런 반응이다.
 
아이들의 모습은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던 이상형이란 것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와, 이제야 내 이상형을 찾았네. 여기 있었네, 여기."
 
머리를 매만져 주던 아내의 손짓이 멈칫함과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이상형이 아니었냐는 아내의 추궁이 시작됐다. 다소 충격을 받은 듯한 아내에게 빈말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솔직히 아니라는 말도 안 되게 속이 꽉 찬 말을 해버렸다. 순수한 아이들과 함께 한 탓일까, 밑도 끝도 없는 솔직함에 나 역시 깜짝 놀랐다.
 
상처 받지는 않았을까, 혹시 내가 실언은 한 것은 아닐까(이제 보면 100%실언이지만) 걱정이 되려는 찰나, 아내의 반문 불가한 명료하고도 당당한 명령조의 말이 울려 퍼졌다.
 
"그럼, 이상형 바꿔!!"
 
'모히또에서 몰디브 한 잔'의 늬앙스에 멍해진 내게 아내가 재차 강요했다. "이상형 바꾸라고!" 아... 마냥 순딩이 인줄 알았는데, 가족에게 맞출 줄만 아는 순종적인 여인인 줄 알았는데, 아내는 당당함을 가진 자존감 넘치는 인물이었다.
 
마지못해 알았다고 말하는 나는 그 모습에 내심 안심이 됐다. 그저 맞춰주기만 하던 아내가 원하는 것은 이렇게도 당당하게 요구하기도 한다는 것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쉽지 않다는 사람의 마음을 요구하다니, 좀 무리한다 싶긴 하지만 이상하게 또 마음이 움직여 이상형이 바뀌어 간다.  

이상형 결정자 남편의 이상형은 아내가 결정한다. ⓒ 남희한

 
연애 6년에 결혼 11년차. 그간 생일이며 기념일에 제대로 된 이벤트를 해준 적이 없음에도 그리 서운해 한 적이 없는 아내다. 연애 첫해에 나란 인간에게서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라고 판단한 아내는 오랜 노력 끝에 이제는 익숙해지다 못해 능수능란해졌다.
 
못 보던 옷이 보여 물으면 작년 자신의 생일에 스스로에게 했던 선물이고 지난 결혼기념일을 기념하고자 마련한 기념품이라고 하는 아내. 말했는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말해도 기억하지 못할 나에 대한 신뢰(?)로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소소한 선물로 스스로를 챙기는 모습이 얄미워 보이지 않는다.
 
실랑이 하느니 맞춰주고 옥신각신하느니 져주고 마는 이 세상의 아내들이 스스로를 잘 챙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족을 대하는 너그러움의 반의 반 만큼만이라도 자신에게 너그러워져, 지치지 않고 작은 보람이라도 느꼈으면 한다. 엄마와 아내의 노고를 쉽게 알지 못하고 자주 잊는 가족들의 긴 각성시간까지 조금만 더 굳건히 버텨 주길. 오늘도 눈치를 말아 먹고 국이 짜다며 불평하는 염치없는 남편이 반성하며 소망합니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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