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미카제 공격으로 격침되는 호위항공모함 세인트 로 호위항공모함 세인트 로는 가미카제 공격으로 격침된 최초의 미군 함정으로 기록됐다. 첫 가미카제 공격이 적함을 격침시키는 데 성공하자 일본 해군 상층부는 특공의 효용성을 오판하기에 이르렀다.
wiki commons
그렇다면, 요란하게 선전되고 독려됐던 특공이라는 것은 전쟁의 흐름에 있어 얼마나 영향을 미쳤던 것일까. 탑승원의 목숨을 내던져 공격을 시도하는 특공 전법에 미군이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최초의 충격에서 벗어난 미군은 철저한 대책을 강구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군의 화망을 뚫고 자폭에 성공하는 특공기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게 됐다.
결과적으로 미군을 상대로 한 특공의 전과는 미미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NHK가 방위연구소를 인용해 2009년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인간어뢰 카이텐의 명중률은 2%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나온다. 바꿔 말하자면, 나머지 98%의 카이텐 대원들은 적함에 닿지도 못한 채 어두운 바다 속에 영영 가라앉고 만 것이다.
의미 없는 특공에 동원된 것은 대부분 10대 중반에서 20대에 이르는 소년들과 청년들이었다. 육해군을 합해 5000여 명 장병들이 특공에 출격했다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제국의 지도부는 어린 청춘들을 자폭으로 내몰고도 패전을 막아내지 못했다. 패전을 막아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특공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든 회피하고자 했다.
패전 직후, 해군 군령부는 연합군사령부에 의해 전쟁 중의 '특공'이 '전쟁범죄'로 심판될 것을 우려했다. 이들은 연합군의 추궁으로부터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지를 골몰했고 그 매뉴얼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나갔다.
책임 회피 나선 군 상층부... '자발적' 강조
그들이 특공의 책임을 피하기 위한 대책으로 내놓았던 매뉴얼은 의외로 전쟁 당시의 선전과 일맥상통했다. 해군 군령부는 특공이 상층부의 명령에 의해 실시된 사실을 강력히 부정하며, 특공대원들의 출격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즉 특공이라는 것은 국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일선 장병들이 애국심에 따라 자발적으로 행한 것이므로 비인도적인 전쟁범죄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결과적으로 특공에 대한 책임을 지고 누군가가 전범으로 기소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최초의 가미카제 공격을 지휘했던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은 '2000만 국민을 특공으로 보내면 반드시 승리한다'고 주장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항복에 반대하다가 자살했다. 특공 병기의 도입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쿠로시마 카메토 소장은 공직에서 추방되는 정도로 일신의 안위를 보전했고, 이후 기업체 임원으로서 안락한 여생을 보냈다. 쿠로시마 소장이 특공에 대해 입에 담거나 글로 남기는 일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외의 관계자들 역시 '특공은 자발적인 것'이라는 책임 회피 매뉴얼을 충실히 이행했다. 이쯤 되면 '마음으로는 반대했지만 당시에는 차마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정도의 회고는 차라리 양심적인 것으로 보일 지경이다.
총력전 수행과 전쟁 책임 회피 과정에서 구축되고 이용됐던 특공 예찬론은 오늘날 일본 사회에도 여전히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특공은 물론 전쟁 자체에 대한 사회적 기억이 희미해져가는 가운데, 일본회의나 야스쿠니 신사와 같은 국수주의 집단들은 특공 신화를 통해 국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하고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특공으로 희생된 이들이 오늘날의 시대에 전하는 교훈은 무엇일까. 진정으로 전몰자들을 기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는 특공의 책임자들이 면피에 손쉽게 성공한 역사 위에서, 특공이 일부 극단세력에 의해 여전히 예찬되는 현실 위에서 간단히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4
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공유하기
"충성 빛나리"... 자국민 죽음 내몬 일본의 끔찍 '신화'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