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3월 11일 이홍구 신한국당 대표가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퇴임 기자간담회를 갖고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 준비 등 향후 거취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이회창의 대권 행보로부터 당의 시스템과 대통령의 리더십을 지킬 필요성이 있었던 이 시기에 신한국당 관리자의 책임을 떠맡은 인물은 부드러운 학자 출신의 전직 총리다. 미국 예일대학 정치학 박사를 거쳐 노태우 대통령 특보, 주영대사, 통일원 장관, 부총리를 역임한 이홍구 전 총리가 바로 그다. 당 총재 김영삼이 지명하고 1500여 명이 참석한 신한국당 전국위원회 회의에서 임명동의안이 통과되면서 1996년 5월 7일 이홍구 체제가 공식 출범했다.
이홍구 대표는 학자나 관료로서는 몰라도 정치인으로서는 약체였다. 조직도 없었고 기질도 정치인 같지 않았다. 권력욕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의지가 드러나지 않으니 정치적 친위 그룹도 형성되기 힘들었다. 게다가 당을 이끄는 데 필요한 민주적 정통성에도 한계가 있었다. 지금의 국민의힘 대표처럼 국민 및 당원 투표로 선출된 게 아니라, 총재가 전국위원회 동의를 받아 임명하는 과정을 거쳤을 뿐이었다.
지금의 국민의힘에서는 올해 6월 11일에 민주적 정통성을 갖추며 선출된 이준석 대표가 11월 5일에 또 다른 민주적 정통성을 갖추며 선출된 윤석열 대선후보에 의해 위축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홍구 대표는 이런 일은 겪지 않았다. 하지만 이회창이라는 막강한 주자가 대권 행보를 벌이는 속에서 취임했기 때문에, 이회창이라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대표직을 수행해야 할 과제가 주어졌다.
위기는 얼마 되지 않아 찾아왔다. 이홍구 체제가 출범한 지 2개월이 지난 1996년 7월 31일 이회창이 당을 크게 흔들어댔다. 이날 발간된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회창은 "좀 더 빨리 실제적으로 여권 후보가 가시화되는 것이 정국 안정에 도움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면서 대선후보를 조기에 가시화하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되면 당의 시스템과 대통령의 리더십이 너무 일찍부터 흔들릴 가능성이 있었다. 1997년 초의 후보 선출을 위해 당이 움직이다 보면 1996년 연말부터 당의 시스템이 변화하는 것은 물론이요, 대통령의 위상마저 흔들릴 가능성이 있었다.
이회창의 의도는 결국 무산됐다. 그가 신한국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날은 선거를 약 5개월 앞둔 1997년 7월 21일. '1997년 초'를 목표로 했던 이회창의 정치 일정이 한참 뒤로 밀려나고 신한국당의 시스템과 김영삼의 리더십이 그만큼 보호받았다.
뜻밖의 리더십
이렇게 된 결정적 요인 중 하나는 이홍구가 보여준 뜻밖의 리더십이었다. 그가 대표가 된 지 8개월 뒤에 보도된 1997년 1월 4일 치 <조선일보> 4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의 리더십에 대한 평가는 대표가 된 뒤로 현격히 좋아졌다. 이 리더십이 이회창의 대권 행보에 부정적 영향을 줬던 것이다.
이홍구의 이미지에 관한 여론조사를 소개한 <조선일보> 기사는 '이홍구가 리더십을 충분히 발휘할 것'이라는 응답과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이 각각 33.5% 대 18.9%로 나왔다고 보도했다.
이홍구의 리더십에 대한 평가가 이처럼 좋아진 것은 상당 부분은 이회창의 관계에 기인한다. 별다른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이회창의 대선 행보에 제동을 건 것이 그의 리더십에 대한 재평가를 낳았다고 해석된다.
그는 1997년 연초에 대선 후보를 결정짓자는 이회창의 요구에 대해 '1997년 7~8월에 확정짓자'는 방안을 일관되게 밀어붙였다. 그해 11월 4일에 한 것처럼 '젊은 대통령후보론'을 제기함으로써 이회창(당시 만 61세) 진영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이회창 진영을 당황케 만들기도 하고 혼선을 주기도 했다.
경우에 따라선 이회창을 비롯한 대권주자들의 입을 틀어막기도 했다. 1996년 9월 10일자 <동아일보> '대선후보 논쟁 이제 그만 좀...'에 보도된 것처럼, 대선 경쟁을 자제할 것을 당부하며 동지 의식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런 주문은 어느 대표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회창·박찬종 등이 그의 요청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이홍구 배후에 대통령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홍구가 '허약'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허약한 이미지'의 힘
대표 취임 이후의 이홍구는 그 자신이 대선주자로 급속히 성장하는 가운데서 이회창 등을 견제했다. 그런데도 이회창이 별다른 불평을 제기하지 못한 채 그의 주문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요인 중 하나는 이홍구의 '허약함'과 무관치 않다.
조직도 없고 욕심도 없어 보이는 '허약한 이미지'는 이홍구의 당 관리에 공정성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했다. 이는 '이홍구 대표가 불공정하다'는 불평이 나오기 힘들게 만드는 요인이 됐다. 1996년 12월 18일 치 <경향신문>은 "(그가) 무욕론을 통해 반발과 견제의 소지를 없애면서" 전진했다고 평가했다. 공정하고 중립적인 관리자의 이미지가 이회창 등의 반발을 억제하는 기능을 했던 것.
그런데 그는 허약한 이미지를 가지면서도 1996년 하반기에 대권주자로서의 위상도 높였다. 부드러운 혹은 허약한 이미지 뒤에 숨어 정치적 실리를 최대한 확보했던 것이다. 이 같은 이홍구의 급상승은 이회창이 조기 가시화를 더 이상 자신 있게 주장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또 다른 요인이 됐다.
이홍구는 1997년 3월 다소 불명예스럽게 당 대표직을 떠났다. 1996년 12월 26일에 신한국당이 정리해고 등의 독소 조항을 담은 노동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국민적인 분노를 일으킨 노동법 날치기 파동이 그 계기였다.
불명예스럽게 퇴진하기는 했지만, 그는 '대세 이회창'을 붙들어놓음으로써 대권주자가 조기에 떠오르는 걸 막았다. 대권을 목표로 1996년 1월에 입당한 이회창은 이듬해 7월에야 후보로 확정됐다. 이를 통해 이홍구는 신한국당의 시스템을 지키고 대통령의 권력 누수를 늦췄다. 공정한 관리자 및 허허실실의 이미지가 '대세 이회창'의 행보를 견제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이회창이 후보가 되고 4개월 뒤인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이 사라지고 한나라당이 출범했다. 이회창은 김영삼의 흔적이 묻은 신한국당을 종결시키고 자기 색깔에 맞춰 한나라당을 만들었다. 이회창의 의도대로 그해 초에 후보가 가시화됐다면, 신한국당이 그해 상반 혹은 중반에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신한국당 수명이 연장되는 데에 이홍구의 뜻밖의 리더십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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