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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적 집값이 다는 아니다, 진짜 뉴욕의 매력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마이 뉴욕 다이어리>

21.12.06 16:46최종업데이트21.12.06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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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 My Salinger Year >, 영화화되다
 
한번 보는 것만으로는 소화하기 힘든 작품을 종종 만난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 역시 그런 작품 중 하나로 추가되어야 할 것 같다. 마치 짐 자무시의 <패터슨>과 메릴 스트립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합해서 둘로 나눈 것 같은 느낌이다. 영화는 1990년대 중반 뉴욕의 유서 깊은 작가 에이전시 '해럴드 오버'에서 1년여 기간 일했던 조안나 레코프가 경험을 되살려 뉴욕 문학계 풍경과 필자의 청춘 시절 진로 방랑을 정리한 원작을 기반으로 한다.
 
<패터슨>이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등 미국 현대 시에 대한 헌사를 바치는 영화라면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영미문학(특히 소설), 특히나 뉴욕 문학계에 바치는 헌정 같은 작품이다. 다만 전자가 여유로운 소도시 패터슨을 배경으로 시의 반복적인 패턴을 영화에 그대로 반영했다면, 후자는 세상에서 가장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 중 하나인 뉴욕을 중심으로 한다. 경쾌한 속도감으로 주인공의 방황과 문학 에이전시의 치열한 업무 풍경을 담아냈다. 여기에 업계의 베테랑이자 산전수전 다 겪은 상사와 그 세계에 갓 진입한 신입 주인공이 등장하는 구도에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몇 편의 영화를 떠올릴 법하다.
 
2_처음 만나는 문학의 숲에서 길을 찾다
 
버클리에 다니던 작가 지망생 '조안나'는 뉴욕의 유서 깊은 작가 에이전시에서 비서로 일하게 된다. 한적한 대학도시에서 줄곧 뉴요커의 삶을 동경해왔던 조안나는 새로운 직장에서 만만찮은 수습기간을 보내면서도 우리가 상상하는 뉴요커의 소소한 삶을 만끽한다. 영화의 초반은 뉴욕 스트릿 투어가이드, 인스타 '갬성'이 꽃피는 분위기다. 세계 방방곳곳에서 모여든 다양한 이들과 문화가 어우러져 아기자기한 거리, 운치 넘치는 독립서점, 문화가 어우러진 작은 바, 살인적인 집값 때문에 더부살이하는 비좁은 아파트 풍경들이 연 타석으로 펼쳐지느라 눈이 정신없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 "마이 뉴욕 다이어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영화사 진진

 
조안나의 직장에서의 업무는 영화의 핵심 뼈대가 된다. 그녀는 에이전시 대표 '마가렛'의 비서 업무를 맡으면서 동시에 회사 소속 작가들에게 온 편지를 대신 읽고 공식화된 답장을 써서 보내는 업무도 담당하게 된다. 영화 속 시대 배경은 1995년이다. 하지만 에이전시 사무실에는 컴퓨터가 없다. 모든 업무 처리는 전화와 타자기, 녹음기로 이뤄진다. 대표인 '마가렛'은 그런 면에서는 단호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요정의 숲 마냥 에이전시는 변화보다는 전통을, 신진 작가 발굴보다는 기존 거장들과의 유대관계에 집중한다. '아날로그'적 업무 처리와 장비에 대한 애찬은 그런 에이전시의 방향과 입장을 상징하는 셈이다.
 
다만 단 한 대의 데스크톱이 중간에 사무실에 도입되긴 한다. 하지만 이 컴퓨터의 용도는 단 한가지다. 이 시절부터 온라인 공간에 올라오기 시작한 불법 스캔본이나 소설 내용 파일을 검색해 저작권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그나마 머지않아 '건드리지 마시오!'란 팻말과 함께 사탄의 흉물 마냥 방치되고 마는 신세다. 그 대신 사무실에는 다양한 기종의 타자기와 육성 녹음기, 파쇄기 같은 장비들이 그득하다. 유서 깊은 역사를 상징하듯 현대 영미문학 거장들의 사진이 벽면을 장식한다. 스콧 피츠제럴드, 애거서 크리스티, 헤롤드 핀처 등 문학도라면 절로 탄성을 지를 목록이다. 그중에서도 에이전시의 자랑이자 대표 격인 존재가 있다.
 
그 존재를 조안나가 담당하게 된다. 사무실 내에선 그를 통칭 '제리'라 부른다. 풀네임은 J.D.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바로 그 이름이다. 팬레터가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사연을 안고 에이전시 사무실로 도착한다. 하지만 (작가의 약력을 보면 알 수 있듯) '제리'는 편지를 수신하지 않는다. 그에 대한 답장은 에이전시의 몫이고 조안나는 '제리'에게 쏟아진 팬레터에 답장을 해야 한다. 그녀에겐 여러 형식으로 메뉴얼화된 답신 예시가 주어진다. 매일 기계적으로 회신을 하면 된다지만 팬레터를 읽는데 심취한 그녀는 그런 건조한 응대가 마뜩찮다. 하지만 회사의 전통은 단호하다.
 
왜 에이전시는 작가가 수령을 거부한 우편물들에 굳이 직원을 고용해 답장을 쓰게 할까? 여기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의 애독자라면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울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실제 소설이 출간된 후 현재까지도 확장되는 영향력, 그 중에서도 존 레넌의 암살범 마크 채프먼의 일화가 소개되고, 그 때문에 어쨌든 팬레터를 누군가는 읽고 답장을 형식적으로라도 보낸다는 것이다. 문학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파급력에 대해 생각해볼 지점이다.
 
조안나는 그 일에 익숙해져가지만 동의는 못한다. 세계 곳곳에서 다종다양한 내용의 팬레터가 제리에게 날아온다. 조안나는 이제 제리의 책을 독파해야 한다. 그래야 될 것 같으니까. 그리고 각자의 절박한 사정이 담긴 팬레터에 매뉴얼을 어기고 직접 자신이 '제리' 입장이 된 양 정성스럽게 답장을 작성해 보내기도 한다. 물론 이는 직업윤리로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사고다. 의도와는 다르게 일이 터지고 조안나는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그런 우여곡절 와중에 하필 '제리'가 그녀의 심장에 불을 지른다. 회사에선 업무에 '작가'를 원하지 않는다. 대표인 마가렛은 '작가는 채용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에이전시 업무에 충실해야지 작가 흉내를 내면 일을 망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업무연락 때문에 조안나와 통화를 나누던 제리는 '당신이 작가라면 매일 15분이라도 글을 써야 한다!'고 조안나에게 신신당부한다. 조안나는 대작가의 격려와 권유에 자신이 진정 하고 싶었던 일이 에이전시인지 작가인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3_풍성한 문화적 코드가 종횡으로 엮이다
 

▲ "마이 뉴욕 다이어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영화사 진진

 
그런 조안나에게 대작가를 만나볼 찬스가 온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J.D.샐린저가 1965년 <뉴요커> 잡지에 실었던 마지막 발표작 "햅워쓰" 관련 30년 만에 시도했던 단행본 출판 진행과정을 적절히 변형해 중요한 전환점으로 삼는다. 조안나가 업무를 담당하게 되고, 이 문학계의 대사건을 계기로 그녀의 행보는 가파르게 굴곡을 타게 된다.
 
영화는 뉴욕 문학계의 풍경과 작가 에이전시의 속사정을 풍성하게 묘사한다. 아주 본격적인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흠뻑 빠져들 만한 단타가 끊임없이 치고 빠지는 식으로 즐거움과 아쉬움을 교차시킨다. 조안나가 속한 에이전시의 대표 마가렛은 1940년대부터 책을 팔고 작가들의 업무 대행을 맡아왔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영화 초반, 조안나가 새로 사귄 뉴욕 친구들은 그녀가 작가 에이전시에서 일한다고 하니 앤 라이스 같은 이름들을 거명한다. 그리고 조안나가 좋아하던 고참 작가가 에이전시와의 계약을 중단하는 과정에선, 상업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속사정도 언급된다.
 
그리고 영화는 뉴욕이라는 공간에 대한 매력적인 선전광고 역할도 자임하고 나선다. 지금은 중국 자본에 인수된 이 유서 깊은 명당의 '좋았던 옛 시절'이 영화 속에서 마음껏 구현되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근사한 호텔 라운지에서 업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디저타임을 갖는 사람들의 심리가 어느 정도 이해될 만큼 매혹적으로 그려진다.
 
영화 초반, 이제 막 뉴요커 생활을 시작한 조안나가 새로운 연인과 만나게 되는 독립서점이나, 친구들과 어울리는 바의 풍경은 요즘 각광받는 인디문화나 힙스터 유행과 자연스레 이어진다. 뉴요커라는 이미지는 여행객들에게나 낭만적일 뿐, 실제 뉴욕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겐 그저 물가 비싸고 집구하기 힘들고 교통 불편한 바쁜 도시인의 전형이라는 푸념을 듣곤 한다. 하지만 누구나 이 도시의 문화 환경에 대해선 찬탄하는 이유가 납득되는 부분이다. 술을 마시던 바에서 즉석 시 낭독이 시작되면 문 밖에서 지나가던 이들도 가만히 경청하고, 허름한 셋집 비좁은 마당에서 조안나가 문학서를 탐독하는 풍경은 퍽 멋스러운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와 함께 영화는 1990년대 중반이라는 시대 배경 고증에도 신경을 쏟는다. 1995년의 뉴욕 풍경은 정작 현재 뉴욕에선 상당부분 사라져버린 상황이기에 미술팀은 비교적 흡사한 분위기로 알려진 캐나다 몬트리올 도시공간을 활용하고,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교차하는 전환기, 그리고 세기말을 앞둔 시절의 패션을 두 주인공, 조안나와 마가렛의 패션 센스 대비로 구현하려 한다. 또한 이 두 사람의 대조되는 패션은 에이전시 내에서 그들의 입장과 위치의 격차, 그리고 세대 간 간극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에이전시 사무실에 첫 출근하던 조안나에게 선배 직원이 주지시키는 복장 규정은 우리네 직장 문화의 변천사와 비교해가며 감상하면 색다른 재미를 던져줄 테다.
 
4_뉴욕의 문학을 겪으며 성장하는 주인공의 인생선택
 

▲ "마이 뉴욕 다이어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영화사 진진

 
풍요로운 문화 코드로 채워진 영화 속 배경과 여러 장치들은 결국 주인공 조안나의 성장 스토리다. 조안나는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바라는지를 일과 사랑의 방황을 겪어가며 차츰 길을 찾아나가게 된다. 질풍노도의 10대처럼 그 과정이 즉흥적이거나 파괴적 영향을 가져오진 않지만 대학 졸업 전후의 조안나에게 버클리에서의 예정된 인생이나 에이전시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며 탄탄대로가 될 수 있을 직업적 자산 대신 전업 작가라는 불안정한 가시밭길을 결심한다는 건 두렵고 위태로운 선택이다.
 
하지만 당대의 대작가를 '멘토'로 두는 바람에 조안나는 고심 끝에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1년여 만에 성장한 조안나의 모습은 뉴욕이라는 곳이 마법의 공간인 양 인식될 수 있는 부작용이 우려될 지경이다.
 
관록과 책임감이 넘치지만 변화에 대해 인정할 줄도 아는 에이전시 대표 마가렛 역에는 반가운 얼굴, 시고니 위버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메릴 스트립이 자연히 연상될 정도로 탄탄한 연기를 펼친다. 조안나 역 마가렛 퀼리는 한창 주목도가 올라가는 신예라는데 시고니 위버에 크게 눌리지 않는 매력을 발산하며 얼굴도장을 찍는다. 거기에 더해 실루엣과 목소리로만 등장하는데도 제3의 주인공 롤을 소화하는 J.D.샐린저의 매력이 오랜만에 그의 책을 집어 들게 만든다. 물론 고풍스러운 에이전시 내 문학의 향기와 사반세기 전 뉴욕의 거리를 재현한 풍경 또한 여느 등장인물보다 더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자리하고 있다.
 
조금 더 문학의 흥취를 여운으로 느낄 수 있게 템포가 조금 더 천천히 갔다면 더 좋았겠지만, 영화 속 조안나처럼 다시 글을 쓸 용기를 얻고 싶거나 문학에 대한 열정을 되살리고 싶은 이들이라면 <마이 뉴욕 다이어리>를 보고 나서 그 불씨를 되살려도 되겠다. 뉴요커의 꿈을 꾸거나 그곳의 기억을 간직한 이들에게도 추억의 사진첩 같은 효과를 선사할 테다. 마지막으로 '호밀밭의 파수꾼'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 반드시 봐야 할 영화다. 혼자 극장에서 남의 시선 아랑곳하지 않고 입 꼬리가 올라가며 킥킥거리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작품정보>
 
마이 뉴욕 다이어리 My Salinger Year
2020|캐나다, 아일랜드|드라마
2021. 12. 9. 개봉|101분|12세 관람가
감독 필리프 팔라도
출연 시고니 위버, 마가렛 퀄리
수입/배급 ㈜영화사 진진
공동제공 하이, 스트레인저
 
2020 베를린국제영화제 개막작
마이 뉴욕 다이어리 호밀밭의 파수꾼 마가렛 퀼리 시고니 위버 뉴요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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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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