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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번호 486'이 없어도 행복했던 이유

[공연 리뷰] 2년 만에 팬 만난 윤하, 연말 콘서트 ‘End Theory'

21.12.14 11:27최종업데이트21.12.1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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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윤하 ⓒ C9 엔터테인먼트

 
"이제야 제 직업을 되찾은 것 같아요!"

2년 만에 대면 콘서트를 펼친 윤하의 첫 멘트였다. 지난 12월 10일부터 12일에 걸쳐, 서울 송파구 올림픽홀에서 윤하의 연말 콘서트가 열렸다. 이 콘서트는 윤하가 지난 11월 16일 발매한 정규 6집 < End Theory >를 기념하는 공연이기도 하다. 앞서 여러 차례 콘서트와 팬미팅의 취소를 경험했기 때문에, 공연은 더욱 철저히 방역 수칙을 준수하면서 펼쳐졌다.

우주와 지구에 대한 사유에서 출발한 < End Theory >의 콘셉트에 맞춰, 거대한 천체를 형상화한 구조물이 무대 위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신보의 첫 곡 'P.R.R.W'의 화려한 퓨처 베이스 사운드와 함께 공연이 시작되었다. 강렬한 밴드 사운드를 뚫고 나오는 윤하의 목소리가 압도적이었다. 이어지는 신곡 '물의 여행'에서는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고음을 들을 수 있었다. 비중격만곡증과 컨디션 난조 등 여러 부침이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오르트 구름'의 가사 중 일부인 '녹이 슨 심장에 쉼 없이 피는 꿈 무모하대도 믿어 난'이 유독 와닿았다.

윤하는 이번 콘서트에서 신보 < End Theory >의 모든 곡들을 라이브로 선보였다. 우주와 시간을 넘나드는 서사를 갖춘 도전적인 작품으로, 최근 타임지가 선정한 '베스트 케이팝 앨범'에 뽑히기도 했다. 윤하는 최상의 컨디션으로 라이브를 선보인 것은 물론, 편곡에 있어 색다른 재미 요소를 추가하기도 했다. '오르트 구름'의 편성에는 밴조를 추가하면서 컨트리의 색채를 강화했다.

윤하의 자작곡인 'Truly'는 일렉 기타와 드럼 등 록적인 요소를 배가해, 곡을 더 극적으로 만들었다. 윤하가 말한 것처럼 음원과 라이브 공연의 묘미는 따로 있는 것이었다. 윤하의 보컬은 웅장한 스트링 사운드에 밀리지 않고, 대칭을 이뤘다. 특히 '하나의 달'과 '별의 조각'은 윤하의 목소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스크 시대가 야속했던 '록윤하'
 

지난 12월 10일부터 12일에 걸쳐 올림픽홀에서 개최된 윤하의 연말 콘서트 'End Theory' ⓒ C9 엔터테인먼트

 
이번 공연은 그 어떤 게스트도 없이, 윤하 혼자 이끌어간 공연이었다. 놀랍게도 최고의 히트곡인 '비밀번호 486'은 셋리스트에 포함되지 않았다. 윤하는 '떼창을 하지 않을 것이라면 비밀번호 486이 무슨 의미이겠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많은 히트곡에 집중하기보다는, 무엇을 들려주고 싶은지에 대한 의지가 돋보였다. 'Rock Like Stars', 'Subsonic'처럼 예상하지 못한 록 넘버를 들을 수 있었던 것 역시 오랜 팬들을 위한 선물이었을 것이다.

록의 비중이 큰 공연이었기 때문에, 함성과 떼창이 제한된다는 것이 유독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 과정에서도 소통과 호응의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중앙 제어에 따라 깜빡이는 응원봉이 관중석을 가득 채웠다. 관객들은 함성 대신 두 발을 굴렀고, 퀸(Queen)의 'We Will Rock You'를 연상시키는 박자로 앵콜곡을 요구하기도 했다.

슬슬 발이 아파져 올 때쯤, 윤하가 등장해 '먹구름', '비가 내리는 날에는', '우산' 등 비를 소재로 한 발라드로 화답했다. 아티스트는 관객의 입꼬리를 볼 수 없었고, 떼창은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그러나 아티스트와 관객이 한 공간에서 눈빛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팬들이 몸짓을 통해 즉석 팬들로부터 즉석 신청곡을 받기도 했다. 함성과 떼창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생긴 진풍경이었다.

(소소한 해프닝도 있었다. 윤하가 내가 앉아있는 곳을 쳐다보자, 나는 '손짓으로 설명하기 쉬운 노래'를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말도 안 돼(2010)'를 불러달라며 두 팔로 'X' 자를 그었다. 윤하는 나의 출제 의도를 잘못 이해한 나머지 '아니야(2013)'의 한 소절을 들려줬다. 지면을 통해 치명적인 '소통의 오류'를 전하고 싶다. 물론 즐거운 오류였다.)

추억만큼 짙어지는 노래

가수와 팬이 같은 호시절을 공유한다. 감히 '동시대성'이라는 키워드로 윤하를 표현할 수 있다. 나와 같은 1990년대 초반생들에게 윤하는 미숙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친구 같은 가수다. 그래서 마지막 곡이 '기다리다(2006)'로 선택된 것은 특별했다. 다시 한번 조명받은 '기다리다'였다. 윤하는 과거 선배 뮤지션들의 음악이 그랬듯, 자신의 음악이 추억의 한 챕터로 기록된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고백했다.

이 공연에 온 관객들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나처럼 처음 윤하의 노래를 들었던 학창 시절을 떠올린 사람도 있을 것이고, 부족한 풋사랑이 끝난 이후 위로받았던 기억을 떠올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각자의 추억만큼의 무게를 등에 진 채, 노래의 농도는 짙어진다. 'P.R.R.W'의 육중한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로 시작된 공연은 미숙하고 수수하던 시절의 감성으로 마무리되었다. 나의 10대 시절을 위로했던 아티스트 그리고 동어반복을 거부한 채 새로운 세계로 나가고자 씨름하는 아티스트를 목도했다. 불후의 명곡 '비밀번호 486'이 없어도, 이 공연이 행복했던 이유다.
윤하 윤하 콘서트 END THEORY 오르트구름 별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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