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 정달순이 학살된 현장에 선 정병두
박만순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하루 전 하나님께 올린 기도문을 암송한 정달순(1912년생)은 참담했다. 자신이 죽으면 어린 병윤-병두 형제가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하니 막막했다. 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는 인공 시절 감투를 맡았기 때문이다.
철야기도를 마친 그는 대신지서로 출두했다. 약식조사를 하는데 아는 사람이 보였다. 치안대에서 치안대장을 맡은 이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는 체 하려는데, 정달순을 본 치안대장이 고개를 획 돌리는 게 아닌가. 정달순의 얼굴은 흑빛이 됐다. 그렇게 간단한 조사를 받은 후 그는 대신면사무소 창고에 갇혔다. 구금된 지 나흘째 되던 1950년 11월 중순의 어느날 정달순을 비롯한 대신면 후포리 사람들은 보통리 강변으로 끌려갔다. 잠시 후 총성이 울리고, 끌려간 이들은 모두 저세상으로 갔다.
부역혐의로 처형된 정달순은 경기도 여주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여주중학교를 나왔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던 그는 농사지으면서도 여러 마을을 다니며 머리를 깎아주는 일을 했다. 또 1936년 세워진 후포성결교회를 어릴 때부터 다닌 독실한 크리스찬이었다. 당시 그는 후포성결교회 집사이기도 했는데, 때문에 그는 공산주의자일 수 없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의 삶이 바뀌었다. 인민군이 여주를 점령했고 그는 후포인민위원회 서기가 됐다. 사실 후포 인민위원장(이장) 밑에서 보조업무를 하는 단순한 일이었다. 정달순은 자신이 교회 집사인 걸 세상이 다 알기 때문에 서기 자리까지 고사하면 인민재판에 회부될까 걱정됐다. 억지춘향 격으로 맡은 감투 때문에 그는 목숨을 빼앗기게 됐다.
생매장된 부역혐의자들
정달순이 업무보조를 했던 후포인민위원장 신재동은 어떻게 됐을까?
"저놈 잡아라!" 군인들이 청년을 향해 총질을 해댔다. 고모 집에 숨어있다가 군인에게 발각된 신재동은 담을 뛰어넘어 도주했지만 대퇴부에 총알이 관통했다. 잠지 주저앉은 그는 죽기 살기로 다시 뛰었지만 얼마 못 가 군인들에게 잡혔다. 대신지서 건너편 야산에 신재동이 묻힐 구덩이가 파였다. 신재동과 같은 마을에 사는 치안대안들이 구덩이를 팠다. 죽음을 앞두고 혼절한 신재동은 잠시 후 구덩이에 던져졌다.
치안대원들이 삽으로 흙을 떠서 구덩이를 덮는데 신재동의 두 다리가 쑥 올라왔다. 그는 아직 살아있는 상태였다. "악!" 치안대원들이 기겁하자 군인들이 호통을 쳤다. "이 새끼들이 죽으려고 환장했나! 그냥 묻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자신들이 묻힐 판이었다. 게다가 상황을 지켜보던 신재동의 형도 나타나 손으로 흙을 파내며 울부짖었다. "어떻게 산 사람을 묻을 수가 있소!" 실랑이가 계속되자 군인은 최후의 선택을 했다. "탕!" 위협 사격이 있고서야 신재동의 가족은 물러섰다. 군인들이 물러가고 가족이 다시 구덩이를 파헤쳤을 때는 이미 신재동의 목숨은 끊어진 후였다.
이들 이외에도 신재동의 아버지 신윤학이 목숨을 잃었고, 여주군 인민위원장이었던 신영학도 처형당했다. 신영학은 인공 시절 말 타고 여주읍내와 대신면을 다녔다고 한다. 희생자 중에는 일제강점기부터 농민운동을 한 이도 있었다. 몽양 여운형, 김용기와 함께 일제강점기 말 이상촌(理想村) 건설운동을 전개한 최용근이다.
경기 양평군 조안면 출신인 김용기에 의해 1935년 주도된 이상촌운동은 민족사상을 기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공동체적 촌락운영으로 농민들의 주체적인 사회경제력 향상을 도모했다. 이들은 1944년 10월 8일 양평 용문산에서 농민동맹을 결성, 공출 반대, 징병·징용 불응 운동을 전개했다. 이 이상촌 운동에 참가한 여주의 대표 인사가 바로 최용근이었다.(여주시유족회, 『한국전쟁 전후 여주시 민간인희생 미신고자 발굴 및 증언 채록사업 2차 보고서』, 2020)
아직도 침묵하는 학살 피해 유족들
▲ 여주시내에 조성된 평화공원
박만순
아버지 정달순이 사망하자 정병윤·병두 형제는 졸지에 천애고아가 됐다. 소년 가장이 된 정병윤은 아버지한테 어깨 너머로 배운 이발 기술로 생계를 이어갔다. 후포리 집에 이발소를 차려 사람들 머리를 깎았고 상구리, 하림리, 가산리는 보름마다 출장 이발을 다녔다. 나머지 시간에는 농사를 지었다. 정병두도 형과 함께 출장이발을 다녔는데 그의 이발 기술은 나날이 좋아졌다.
명절을 앞두고는 특히 더 바빴다. 혼자서 하루에 60명을 이발하기도 했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고 머리 감기는 생략했다. 이발료는 쌀 반 되. 날이 늦어 하룻밤 숙식을 해야 할 때는 지인의 집에서 신세를 졌는데 감사 치례는 그 집 식구 머리를 공짜로 깎아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졍병두가 정식으로 이발 면허증을 획득한 것은 군입대 후였다. 1965년 그는 부산진에 있는 육군직할부대인 '병기차량재생창'에 배치됐고 그해 가을에 부산에서 치르는 이발 면허시험에 응시했다. 전국에서 1200명이 응시해 800명이 합격했는데, 그도 기쁨을 맛봤다. 제대 후 정병두는 농사를 지으면서 명절 때만 이발 일을 했다. 이후 소도 키우고 건축 일도 하는 등 생활전선에서 힘겹게 살아왔다.
집 나이 팔십을 맞은 정병두(여주시 대신면 후포리)는 2018년부터 4년째 '한국전쟁 여주유족회장'을 맡아 인생 2막을 살고 있다. 한국전쟁기 국가폭력에 의해 여주에서 희생된 분들을 위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힘쓰고 있다. 이 지역 희생자는 대부분 부역혐의에 의한 경우이기에 아직도 유족 대다수가 나서기를 꺼린다. 그는 한 명의 유족이라도 더 찾아내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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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갇힌 창고 앞에서 보초 서야 했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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