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태재단 이사장 시절 구 군산역 광장에서 유종근 후보 지지를 호소하는 김대중.
조종안
하지만 뉴DJ 플랜은 대체적으로 껍데기를 바꾸는 데 주안점을 두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김대중이 걸어온 노선을 바꾸거나 그간 했던 말들을 뒤집는 것은 아니었다. 일반 국민들이나 보수층이 잘 몰랐던 김대중의 진짜 면목을 보여주는 데 최대 목적이 있었다. 머리만 염색하는 것이지 머릿속까지 염색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위 <한겨레> 기사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지금까지 그에 대해 드리워져 있던 장막을 거둬내고 온건·개혁적인 진면목을 보여준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껍데기만 바꿨을 뿐 알맹이는 바꾸지 않았다. 속은 오히려 더 단단히 했다. 이는 지역대결 구도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났다.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그의 노력은, 영남에 가서 영남 사람인 듯 하는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지역구도를 위협할 만한 새로운 구도를 띄우고자 노력했다. '비토 계층 설득이 열쇠' 기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중소기업과 노동자·농민·노인·여성 등 소외계층의 대변자로서 지지층을 개척해 나가려는 것이다. 이는 여권의 '호남 대 비호남 대결 전략' 구도를 타파하려는 측면과 현 정권의 실정을 부각시켜 기득권층과 소외계층의 이익대결 구도로 유도하려는 전략이 함축돼 있다. 실제로 민주당이 비호남권에서 표를 증가시키는 방법은 계층적 공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역대결 구도로 가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가 구사한 것은 호남 색채를 덜어내는 게 아니라, '소외계층 대 기득권층의 구도'를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서민대중의 편에 서겠다는 정책적 기조를 더욱 강화하는 가운데, 화장을 하고 손수건을 꽂는 등의 외형적 변화를 가미했던 것이다. 뉴DJ 플랜은 그의 기본 노선에 상처를 주지 않았다.
김대중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는데도, 보수세력은 뉴DJ 플랜에 관심을 보였다. 이는 보수층이 이 플랜에 감복했기 때문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보다는 정치 상황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뉴DJ'는 성공했나
1992년 대선은 3당합당을 통한 보수대연합 뒤에 치러졌다. 화학적 결합이 결여된 이 대연합으로 인해 민주자유당(민자당) 내에서는 분열이 심각했다. 야당 출신인 김영삼을 중심으로 대선을 치르는 것에 대한 당내 반발이 대단했다. 게다가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까지 대선에 뛰어드는 바람에 보수층의 표가 분산됐다.
이 상황은 김대중의 당선 가능성을 높여줬다. 이것이 뉴DJ 플랜에 대한 보수층의 관심을 유발하는 요인이 됐다. 위의 '비토 계층 설득이 열쇠'는 "김 후보에 대한 기대 상승은 정국 상황의 변화에서 기인된 측면이 크다"며 이렇게 분석했다.
"특히 민자당에서 김영삼 대표가 후보로 출마하고 이종찬 의원이 독자 출마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은 그의 대권 접근을 위한 최선의 구도를 제공해주고 있다. 게다가 국민당 정주영 대표의 등장은 이번 총선에서 증명됐듯 민자당의 기반을 잠식함으로써 김 후보에게 반사적 이익을 안겨줄 가장 큰 변수로 꼽히고 있다."
뉴DJ 플랜에 대한 관심이 김대중 자체에 대한 호감 때문이 아니라 보수세력 분열로 인한 반사효과라는 분석이다. 김대중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보수세력이 그를 함부로 비토할 수 없게 된 상황이 뉴DJ 플랜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는 것이다.
5년 뒤인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승리한 최대 요인도 김영삼·김종필의 분열이었다. '적장' 김종필이 김대중에게 가세한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고, 김대중의 '새 모습 바꾸기'는 그만한 효과를 낳지 못했다.
1992년 대선 운동 당시, 뉴DJ 플랜으로 일부 보수층 유권자들이 김대중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선 판도에 커다란 영향을 주지 못했다. 1987년에 27.04%로 3위였던 김대중의 득표율이 1992년 대선에서는 33.82%로 2위로 올랐지만, 이는 3당 합당에 분노한 김영삼 지지층 일부가 김대중 지지로 돌아선 것에 크게 기인하는 측면이 컸다.
대선 직후의 <한겨레>에서는 뉴DJ 플랜이 오히려 감표 요인이 됐다는 분석도 나왔다. 1992년 12월 22일자 <한겨레>는 "(김대중이) 반기득권층 내지 민주·민중세력의 전폭적인 지지는 얻어내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서 "뉴DJ 플랜으로 요약되던 민주당의 유화 전략이 보수층과 반기득권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의도했던 대로 모두 잡기보다는 거꾸로 둘 다 놓친 원인이 되었을 개연성을 높게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1987년 대선 때 민주진영의 지지를 받은 김대중·김영삼의 득표율 합계는 56.07%였다. 1992년 대선 때 민주진영의 지지를 받은 김대중의 득표율은 33.82%였다. 김대중의 득표율이 1987년의 27.04%보다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진영의 득표율은 1992년에 전반적으로 감소했다.
1992년 대선은 1987년 6월항쟁과 1988년 총선 참패로 위기에 몰린 보수세력이 3당 합당과 공안정국을 통해 반격을 시도하던 시기에 치러졌다. 진보에 대한 보수의 반격이 강할 때였던 것이다. 이런 시기에 민주당은 뉴DJ 플랜으로 양쪽을 둘 다 잡겠다는 전략을 세웠지만, 성공에 이르지 못했다.
지금의 이재명 후보는 1992년과 달라진 환경에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뉴DJ보다 '뉴이재명'의 변신이 훨씬 광폭이라는 점이다. 뉴이재명이 2022년 3월에 유권자들을 어떻게 움직일지 주목할 만하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