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으로 살아갈 소녀들에게, 이 싸움을 잘 봐

소설 '소녀를 위한 페미니즘'을 읽고

등록 2021.12.28 07:59수정 2021.12.28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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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교직 발령 2년차 해에 긴 머리를 싹둑 잘라 단발로 만들었다. 그때 교무부장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아직 머리를 자르기에는 이른 나이인데..." 나는 그 말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짧은 단발을 해야 할 나이, 하지 말아야 할 나이란 게 있는 걸까? 젊은 이십대 중반 여자라면 당연히 긴 머리를 고수해야 하는 건가?

또 다른 경우도 있다. 내 대학 시절 동아리 동기가 숏커트를 하고 나타났다. 그때 동아리 선배가 엄청 충격을 받은 듯한 내색을 하였다. 평소 심성 좋기로 유명한 동아리 선배의 반응에 나야말로 충격을 받았다. 여자가 숏커트를 한 게 대체 왜 문제지?


내 남동생은 나만 보면 "어쩌다 페미가 됐어?"라며 혀를 끌끌 찬다.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인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페미니스트에 대한 나쁜 감정을 품고 있지도 않다. 누군가 나에게 "너 페미야?"라고 묻는다면 단편집 <소녀를 위한 페미니즘> 중 박하령 작가의 <숏컷>의 한 대목처럼 이렇게 말하고 싶다.     
     
"페미가 무슨 신분이야? 너네들한텐 엑스맨 같은 건가? 근데 만약에 페미가 잘못된 일을 감지하는 사람이라면 난 페미가 맞을 거야. 남자 여자 대결하는 게 페미가 아니라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않게 균형을 맞추자는 게 페미니즘이라잖아. 그리고 자꾸 숏컷이라고 머리 스타일로 시비 거는데, 이건 페미랑 아무 상관 없는 그냥 취향의 문제야. 다연이가 춤춘 것도 너네들이 공 차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기호의 문제라고. 알아?" - 숏컷 본문 70쪽   
 

소녀를 위한 페미니즘 표지 책 표지 ⓒ 우진아

 
이 단편집에 실린 또 다른 단편소설 <이제 소녀 같은 건 때려치우기로 했다>에서는 거짓말로 여자 친구와 잤다고 말하는 남학생 때문에 온갖 혐오와 공격을 받는 고등학생 소녀가 나온다. 소설 속 동급생들은 그 누구도 남학생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대단하다고 추켜세운다. 그 반대편에서 소녀는 사정없이 혐오의 손가락질 대상이 된다.       
   
아이들은 마치 살점을 뜯어먹는 피라냐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수많은 물음표가 아린의 정수리를 찍어 내고 살점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성율에게는 친구들의 전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게 진짜냐고 묻는 아이도 있었고, 드디어 해냈냐며 축하한다는 친구도 있었으며, 어떤 아이는 이제 김아린은 완전히 '네 것'이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성율은 친구들 사이에서 승자가 되어 있었다. - '이제 소녀 같은 건 때려치우기로 했다' 본문 82쪽     

성범죄의 대상이 되어 고통 받았음에도 여자가 짧은 치마를 입어서, 먼저 유혹해서 등등 욕설과 2차 피해에 시달린다. 여기서 남자는 늘 예외다. 그래서 반기를 들면 소설 속 내용처럼 '군대'와 '임신' 문제로 돌고 돌며 젠더 갈등이 되어버린다.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누가 더 힘드나, 누가 더 손해를 보나 대결구도가 펼쳐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두려움에 떨지 않을 권리, 위험하지 않아도 될 권리, 손가락질 받지 않아도 될 권리를 주장하는 여자들은 '꼴페미'라는 낙인이 찍힌다.    
 
사람들은 세상이 위험하기 때문에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다는 이유로 다시 소녀들에게 많은 것을 포기하라고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솔지는 알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하고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세상이라면 그것은 올바른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 '이제 소녀 같은 건 때려치우기로 했다' 본문 130쪽     
 
완벽한 남성 위주의 세상에서 여성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성적 대상화 되는 여성으로서의 객체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동등한 주체로서 당당히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남자만이 가장의 짐을 짊어질 필요도 없고, 여자들만 경력단절이 되어 가사노동에 매달릴 필요도 없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평등한 사회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 아닐까. 남자와 여자 모두 인간 그 자체로서 존중받는 사회 말이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선택지는 이수와 만날 것인가, 헤어질 것인가가 아니다. 오히려 전쟁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이다. 조용히 이수와 깨지고 말 것인가 아니면 전쟁을 해서 이수와 더불어 행복하게 잘 지낼 것인가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 전쟁을 하고 난 뒤에 행복해진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어떤 문제는 전쟁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모두에게 평화를 얻게 되기도 한다. 전쟁은 총성이 울리는 전쟁터에만 있는 게 아니니까.  - '숏컷' 본문 74쪽
 
<이제 소녀 같은 건 때려치우기로 했다>에서 아린은 성율에게 강제로 성폭행을 당했음에도 '더럽다'는 손가락질을 받고 조리돌림의 대상이 되어야했다. 성에 있어서 피해자인 여자는, 범죄의 희생양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더한 약자가 된다. 이런 사회 구조 속에서는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여성을 획득한 트로피 쯤으로 여기는 남성도, 그 대상이 된 여성도, 그 모든 걸 지켜보는 나머지 사람들도.     
    
아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일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머리가 까맣게 비어버린다는 것을. 머리 위에서 천둥, 번개가 치고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어떤지 모를 것이다.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아무도 들어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다고 아린은 생각했다.  - 이제 소녀 같은 건 때려치우기로 했다 본문 106쪽   

종종 성범죄 문제 또는 집단 따돌림으로 생을 마감하는 여성들이 뉴스를 장식한다. '가스가 새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폭발하면 다 죽는다'는 소설 속 문장처럼 족히 성별 갈등, 혐오를 종식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봉합할 수 있도록 젠더 감수성을 키웠으면 좋겠다. 남성과 여성은 다르면서도 또한 다르지 않다. 나와 다른 성별로 바라보면서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덧붙이는 글 브런치 https://brunch.co.kr/@lizzie0220/263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소녀를 위한 페미니즘

김진나, 박하령, 이꽃님, 이진, 탁경은 (지은이),
자음과모음, 2019


#페미니즘 #단편집 #소설 #박하령 #이꽃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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