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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계 이승훈 중심으로 민족대표 33인 선임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 12] 종교계 중심으로 초교파적인 항일독립선언 준비해

등록 2021.12.31 15:33수정 2022.01.2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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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손병희 ⓒ 자료사진

 
종교계를 중심으로 초교파적인 항일독립선언을 한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천도교는 손병희, 기독교는 이승훈, 불교는 한용운이 책임을 맡았다. 남강 이승훈은 젊은 날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회심하여 민족운동에 뛰어들었다. 신민회 입회, 오산학교 설립, 기독교 입문, 안중근사건ㆍ105인사건으로 복역, 목사세례ㆍ평양장로회 신학교 입학, (1919년 2월) 상하이에서 입국한 선우혁과 만나고, 독립선언에 대해 천도교 측과 접촉하는 등 기독교계의 책임을 맡았다. 이승훈은 이즈음 서북지역에서 기독교의 독자적인 독립선언을 계획하고 그러던 중에 천도교 측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

마침 서울의 천도교 측에서 독립선언에 대해 협의하자는 연락이 왔다. 이에 남강은 2월 10일 서울에서 천도교 측 인사들을 만났다. 천도교 측에서는 서북지역에서 독립선언을 위한 계획이 있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었고, 남강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에 천도교 측은 거족적인 독립선언을 위해 천도교와 기독교가 제휴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물었다. 남강은 이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민족의 독립을 위한 거사인데 종교가 다른 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석 1)

예나 지금이나 종교간의 연대는 쉽지 않은 일이다. 무단통치시대 민족독립 선언과 같은, 개인은 물론 교단의 운명이 걸린 문제와 관련해서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기독교와 천도교의 합동 문제 - 이 문제는 3ㆍ1운동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중대한 문제였다. 아다시피 그 당시 기독교회는 대체로 보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인은 일단 기성 종교와 조상 숭배를 우상시하고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주장을 고집했다. 여기에 또한 선교사들의 근본주의 신학사상이 부채질하여 한국 기독교회는 천도교에 대하여 배타성과 독단성을 발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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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 이승훈 선생 ⓒ 자료사진

 
지도자의 리더십은 위기 때에 발휘되는 것이 참다운 리더십이다. 그는 배타적이거나 몸을 사리는 기독교계 인사들을 설득하고 꾸짖었다.

시간이 너무도 촉박했다. 남강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독교계 인사들을 설득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녔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목사나 전도사가 정치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람도 있었고, 다른 종교인 천도교 측과의 제휴를 마다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남강은 나라 없는 놈들이 어떻게 천당을 갈 수 있으며, 이 백성이 모두 지옥에 있는데 당신들만 천당에서 내려다보면서 거기 앉아 있을 수 있겠냐며 그들을 꾸짖었다. (주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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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한용운 ⓒ 자료사진

 
천도교 측은 이미 손병희 등 15인이 선정되었고, 기독교 측은 2월 27일 이승훈의 주도로 박희도ㆍ이갑성ㆍ오화영ㆍ최성모ㆍ이필주ㆍ함태영ㆍ김창준ㆍ신석구ㆍ박동완 등 10인이 이필주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들 중 함태영은 서명자들이 구속될 것에 대비,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제외하고, 신흥식ㆍ 양전백ㆍ이명룡ㆍ길선주ㆍ유여대ㆍ김병조ㆍ정춘수 등 7인을 다시 교섭하여 모두 16인의 민족대표가 선정되었다.


불교측은 한용운이 2월 24일부터 각지의 승려들에게 독립선언 준비 사실을 극비리에 알리면서 서명에 참여할 것을 종용했으나 해인사의 백용성만이 서명했을 뿐이었다.

유림측은 향리 성주에 있는 김창숙에게 전갈이 갔으나 마침 모친의 병환으로 2월 27일경 상경했을 때는 서명자가 이미 결정되고, 독립선언서가 인쇄에 들어감으로써 '천추의 한'을 남겼다. 김창숙은 이후 유림을 동원하여 <파리장서> 등 별도의 독립운동을 폈다.

독립선언의 준비를 맡은 최린 등은 선언서의 기초를 최남선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1919년 2월 상순 최남선은 "일생애를 통하여 학자의 생활로서 관철하려고 이미 결심한 바 있으므로 독립운동 표면에는 나서고 싶지 않으나 독립선언 문건만은 내가 지어볼까 하는 데 그 작성책임은 형(최린-필자)이 져야 한다"고 하면서 나의 의사를 물었다.

"나는 육당의 충정과 처지에 동정하여 이를 승락하고 속히 기초할 것을 부탁하였다." (주석 4)

최남선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 중 동맹휴학으로 중퇴하고, 이광수 등과 사귀면서 서구문학 작품을 탐독했다. 귀국 후 도서출판 신문관을 창설, 잡지 <소년> 등을 발행하면서 근대문학의 개척자가 되었다. 당시 조선의 제1가는 문인ㆍ문필가로 문명을 날렸다. 독립선언서를 쓰게 된 배경이다. 

그는 독립선언서를 쓰는 영광을 차지하고도 후일 변절하여 오명을 역사에 남겼다. 독립선언 준비에 크게 기여한 최린도 비슷한 길을 걸어 초심을 잃었다.

만해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최남선이 쓰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최린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직접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사람에게 독립선언서를 쓰게 할 수는 없다고, 자신이 집필할 것을 요구했으나 바뀌지 않았다. 한용운은 독립선언서 말미에 <공약3장>을 추가하였다.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비롯하여 일본정부와 귀족원, 중의원 및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통고서, 그리고 미국대통령 윌슨에게 보내는 청원서와 파리강화회의 열국 위원들에게 보내는 서한을 도맡아 집필하였다. 


주석
1> 한규무, <이승훈>, 126쪽, 2008, 역사공간.
2> 전택부, 앞의 책, 328쪽.
3> 한규무, 앞의 책과 같음.
4> 최린, <여암문집(如菴文集)> 하권, 192쪽, 여암문집편찬위원회, 1971.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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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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