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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기가 강호동 때문에 은퇴를 결심한 이유

[TV 리뷰] MBN <국대는 국대다>

22.02.20 12:35최종업데이트22.02.20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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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스포츠에는 고트(GOAT,Greatest Of All Time)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말 그대로 어느 한 분야에서 '역대 최고 선수'를 의미하는 말이다. 농구에 마이클 조던, 골프의 타이거 우즈, 축구의 펠레, 미식축구의 톰 브래디 등은 해당 종목에서 시대를 초월하여 이견의 여지가 없는 고트로 꼽히는 대표적인 선수들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민속놀이이자 전통스포츠를 대표하는 씨름의 고트를 꼽으라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부분 이견없이 '불세출의 천하장사' 이만기를 꼽을 것이다.
 

<국대는 국대다> 이만기 ⓒ MBN


지난 19일 방송한 MBN <국대는 국대다> 3회에서는 두 번째 레전드로 씨름 전설 이만기가 출연했다. 은퇴 이후 그동안 교수라는 직함이 익숙했던 이만기는 오랜만에 '선수'라는 호칭으로 불린 데 대하여 "속에서 무언가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이 있다"고 밝혔다. 한편으로 씨름인들은 "선수보다는 장사라고 불러주는 걸 좋아한다. 같은 씨름인들끼리 모여도 장사 타이틀 유무에 따라 격이 달라진다"는 뒷이야기를 전했다.
 
지금이야 씨름판의 황제로 불리지만 알고보면 이만기가 처음부터 주목받았던 것은 아니다. 당시 씨름 대표 캐스터로 불리우던 이규항 원로 스포츠 아나운서는 "10년넘게 씨름 중계를 하면서 천하장사가 되기전까지는 이만기 선수의 경기를 중계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전했다. 최동철 원로 스포츠 기자도 "이만기가 초등학교때부터 씨름을 했지만 그전까지 우승한 적이 없었다"고 밝혔다.
 
1983년 초대 천하장사 대회에서 당시 만19세 무명의 이만기는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던 이준희를 물리치고 결승에 진출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결승 상대는 또다른 우승후보 최욱진이었다. 두 사람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5판 3선승제의 결승에서 2대 2로 팽팽하게 맞선 끝에 마지막 승부에서 이만기가 들배지기와 호미걸이로 상대의 균형을 무너뜨리며 극적인 승리를 따냈다. 천하장사가 확정된 이후 이만기가 무릎을 끓고 두손을 잡으며 격하게 포효하는 모습은 씨름 역사에서 영원히 잊지 못할 명장면으로 남았다.
 
묘하게도 이만기와 결승상대인 최욱진은 모두 한라급(95kg)이었고 전날 열린 한라장사 결승전에서 먼저 만났을 때는 이만기가 패했다. 천하장사 결승전에서 그 유명한 가슴에 파스를 붙이고 나온 장면도 전날 최욱진과의 경기에서 입은 부상 때문이었다고. 전날 패배로 잠을 못이룰 정도로 자책하며 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는 이만기는, 운명의 장난처럼 하루만에 천하장사 결승전에서 최욱진과 리턴매치를 펼쳤고 초인적인 활약으로 설욕에 성공했다.
 
이만기는 당시의 경기 장면을 다시 보면서도 "제가 제가 아닌 것 같다. 다른 사람의 혼이 들어와서 경기한 느낌"이었다고 고백했다. 이만기는 우승 직후 눈물을 흘린 이유에 대하여 "그동안 씨름을 하면서 겪었던 모든 과정과 힘든 기억들이 한편의 드라마처럼 흘러가더라"고 회상했다.
 
첫 우승은 전설의 시작에 불과했다. 이만기는 천하장사 10회를 비롯하여 백두장사 18회, 한라장사 7회 등 총 49회의 장사 타이틀을 보유했다. 선수 커리어 총 승률은 무려 84.9%였고, 전성기에는 한해 최고승률이 무려 97%까지 육박하기도 했다.
 
이만기를 대표하는 또다른 수식어는 '기술씨름의 선구자'였다. 씨름에는 상대를 파고들어 넘어뜨리는 '낮추는 씨름'과 힘으로 상대를 들어서 넘어뜨리는 '드는 씨름'으로 나뉘어진다. 이만기는 "어릴적에는 체구가 작아서 낮추는 씨름을 했지만, 고등학교 2학년때부터 3년간 폭풍성장을 하면서 드는 씨름 스타일로 변하게 됐다. 두 가지 스타일을 다 훈련하게 되면서 기술의 폭이 넓어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자신보다 훨씬 거구의 장사들을 기술과 전략으로 농락하는 이만기의 씨름은 마치 골리앗을 제압하는 다윗을 보는듯한 쾌감을 선사하며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이만기의 이름을 빗대어 '만개의 기술'을 보유했다는 찬사가 나오기도 했다. 김기태 씨름 감독은 "이만기는 상대가 기술을 걸지 못할 정도의 파워와 스피드를 겸비했다"고 분석했고, 국영호 스포츠 기자는 크고 힘센 선수들을 모래판에 고꾸라뜨리는 영리한 기술씨름의 대가였다"라고 평했다.
 
이만기는 "상대방에게 쉴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한 체력이 필요했다"며 자신의 경기 스타일을 설명했다. 이만기는 체력과 하체 강화를 위하여 현역 시절에는 스쿼트를 무려 265kg까지 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만기는 "씨름은 역칠기삼(力七技三)"이라며 "기술이 좋아도 힘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기술과 힘이 조화를 이뤄야한다"고 강조했다.
 
뛰어난 실력만큼 인기도 독보적이었다. 이만기는 어린 학생부터 장노년층까지 전 세대에 걸쳐 사랑받았다며 조곤조곤 자기 자랑을 이어갔다. 당시 인기의 지표인 광고 출연도 빼놓을수 없었다. 이만기는 건강식품, 치약 등 다양한 제품의 모델로 나섰다.
 
특히 종합 비타민 '게브랄티'는 발음상 오해를 부를수 있는 제품명 때문에 당시에도 큰 화제가 된 바 있다. 이만기는 광고 촬영을 위해 한겨울인 1월에 영하 10~15도의 오대산과 설악산에서 웃통을 벗고 진짜 통나무를 들고 광고촬영을 해야했으며, 심지어 통나무를 운반할 수단이 없어서 모델인 이만기가 직접 산 정상까지 들고가야했다는 거짓말같은 무용담을 들려주며 모두를 포복절도하게 했다.

당시 언론보도를 바탕으로 이만기의 엄청난 수입이 공개됐다. 당시 이만기는 8천67만9천 원으로, 8천45만1천 원으로 연예인 부문 1위였던 개그맨 이주일보다도 높았으며 유명인을 모두 통틀어 2년 동안 개인 소득 1위였다고. 당시 1500만원으로 강남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시세였음을 감안할 때 지금으로 치면 수십 억에 해당하는 대우였다. 하지만 이만기는 세금빼고 카퍼레이드-기부-동네 잔치 등으로 이래저래 남은 돈이 얼마 없었다는 웃픈 뒷이야기도 덧붙였다.
 
승승장구하던 이만기의 독주를 가로막은 것은 바로 마산상고 7년 후배인 강호동이었다. 1989년 제 46회 백두장사 결승전, 1990년 천하장사 준결승전 등에서 연이어 맞붙은 두 사람의 치열한 명승부를 펼쳤다. 이만기는 "강호동은 내가 지금까지 본 선수중 가장 씨름꾼이 되기에 천부적인 몸을 가졌다"고 극찬했다.
 
당시 이만기와 강호동 두 사람은 서로 먼저 무릎을 꿇지 않으려고 기싸움을 펼치는가하면 감독들끼리도 나와서 고성을 주고받는 등 시종일관 팽팽한 신경전을 거듭했다. 이만기는 당시 내내 괴성을 지르며 도발하는 강호동에게 이만기가 "깝죽대지 마라. 이 새X야."라고 일갈했던 유명한 장면을 MC 전현무에게 그대로 재연하여 웃음을 자아냈다.

결국 강호동은 이만기를 물리치고 결승에 올라 천하장사까지 등극했다. 놀랍게도 당시만 해도 만 25세였던 이만기의 전적은 290승 19패(93.9%), 만19세의 강호동은 6승 25패(19.4%)에 불과한 풋내기였다. 아무도 예상하지못한 강호동의 승리는, 바로 씨름판의 세대교체를 의미하는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이만기는 강호동의 등장이 은퇴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숨은 일화를 밝혔다. "씨름이 앞으로 국민적인 사랑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스타 선수를 키워놓고 나와야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강호동이 혜성처럼 등장하면서 이제 그 자리를 물려주고 나와도 되겠다는 결심이 섰다"고 고백했다.
 
이만기는 "씨름은 내게 인생의 전부"였다고 고백하며 "정말 열심히 살았고, 최선을 다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는 날들"이라고 지나온 시간들을 회고했다.

한편으로 이만기는 은퇴 이후 평범한 일반인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지나친 강박감 때문에 오히려 공황장애가 왔다는 사실을 고백하기도 했다. 우연히 열차 안에서 접한 잡지에서 공황장애에 대하여 설명한 기사를 읽고 자신의 증상이 '마음의 병'임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다행히 지금은 완전히 극복한 상태라고.
 
MC들은 현역 선수와 경기를 해야하는 <국대다> 도전을 앞두고 부상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다른 종목과 달리 씨름은 신체접촉과 힘을 요구하는 투기 종목이기 때문이다. 이만기는 "제안을 받고 처음엔 망설였지만, 길고 짧은건 대봐야 안다"며 여전한 승부사다운 본능을 드러냈다.
 
이만기는 꾸준한 자기관리를 바탕으로 환갑에 이른 나이에도 탄탄한 몸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신체측정에서 이만기의 트레이드 마크인 허벅지 둘레는 무려 64cm-장딴지는 48cm로 측정됐다. 이만기는 20년 가까운 나이차가 나는 김동현을 씨름으로 두 판 연속 가볍게 제압하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이만기의 대결 상대는 2021 태백장사 출신의 허선행이었다. 1999년생의 허선행은 이만기와는 무려 36살 차이로 그의 아들보다도 더 어린 후배였다. 이만기는 "노련미는 나을지 몰라도 체력이 관건"이라고 밝히면서도 "후배라 생각하지 않고 현역이라 생각하겠다. 선행아, 기다려"라며 출사표를 던졌다.
 
경기 준비에 앞서 이만기는 이희윤, 이승삼 등 씨름계 지인들과, 둘째아들 이동훈 씨를 잇달아 만났다. 지인들은 현역과의 경기 소식에 모두 실소를 금하지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영원한 천하장사 이만기의 저력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씨름은 한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전성기였던 1980년대에는 지금의 프로야구 못지않은 국민스포츠로 꼽힐 정도였다. 명절마다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천하장사 씨름 대회는 구름인파를 몰고다니며 관중석이 항상 만석이었고, 지상파에서도 황금시간대에 생방송되며 9시뉴스가 씨름 인기에 밀려 정규시간보다 늦게 방송될 정도였다. 당시 천하장사 대회의 시청률은 무려 최고 67% 까지 육박했는데, 이는 국제적인 스포츠 이벤트로 꼽히는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능가하는 인기였다.
 
온 가족이 TV앞에 둘러앉아 씨름 경기를 시청하는 것은 당시의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리고 인기 스포츠에는 당연히 슈퍼스타의 존재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강호동, 백승일, 최홍만, 이태현 등 수많은 씨름 레전드중에서도 단연 오늘날 '국민 스타'의 원조는 이만기였다. 그가 걸어온 인생이 곧 한국 씨름역사의 흥망성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0년대 이후 몰락의 길을 걸었던 씨름은 최근 젊은 스타들을 배출해내며 다시 조금씩 부흥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만기가 걸어온 씨름 인생을 되돌아보고 환갑의 나이에 현역 스타와의 맞대결에 기꺼이 도전하는 모습은, 바로 한국 씨름의 과거와 현재를 함축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씨름 팬들에게는 특별한 여운을 남긴다.
 
또한 이만기는 도전의 이유로 아들들에게 아빠로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냈다. 만기는 "아빠들은 외롭다. 말만 하면 꼰대나 옛날 사람 취급을 받는다. 아빠의 건강함과 건재함을 보여주면서 대한민국 모든 아버지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미 범접할 수 없는 전설의 위치에 있으면서 굳이 적지않은 나이에 부담을 무릅쓰고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려는 이만기의 용기는 그 자체로 박수를 받기에 충분하다.
국대는국대다 이만기 강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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