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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아이를 학대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을까?

[은밀한 맥락을 찾아서 3] 모두가 보고 있었지만,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등록 2022.02.23 09:32수정 2022.02.23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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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정인이 사건"으로 불렸던 "양천입양아동 학대사망사건"은 2020년 10월 13일 서울시 양천구에서 발생한 아동 학대 살인 사건으로 2021년 11월 26일 2심 재판부가 양부에게 징역 5년, 양모에게 징역 35년을 선고했으나 검찰과 양부모 모두 상고한 상황이다. 사진은 2021년 5월 14일 양부모에 대한 1심 선고가 열린 서울남부지법앞에서 한 시민이 정인이 사진을 들고 주저앉아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는 모습. ⓒ 권우성


앞선 두 편의 기사('양천입양아동 학대사망사건'에 숨은 진실그들은 언제부터 '악마'가 되었을까?)를 통해 양천입양아동 학대사망사건의 숨은 맥락에 대한 두 가지 질문의 답을 찾아왔습니다. 첫째, 그들은 왜 '그 사람(입양모)'이 악당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둘째,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정말 악마인가? 이제, 세 번째 질문에 답할 차례입니다.

그는 '어떻게' 그 어린아이를 학대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을까? 저는 이 사건을 포함한 여러 아동학대 사건들을 포괄하여, 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답변을 내놓으려고 합니다. 첫째, '하다 보니까', 둘째, '그래도 될 줄 알고', 셋째, '아무도 말리지 않아서'입니다. 각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서부터는 양천입양아동 학대사망사건뿐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경험해 왔던 다양한 아동학대 사건들을 염두에 두고 기술하고자 합니다.

첫째, 가해자가 처음에는 체벌 정도로 행했던 것이 점차 학대와 폭력으로 발전되어 갔을 것이라는 가설입니다. 그가 아이를 입양하기 전까지 악마가 아니었다면, 그의 악마성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그 아이를 데려오고 키우면서 '곤경'에 처한 시점부터였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친생자녀를 양육했던 때와 유사한 패턴으로 그 아이를 대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학대 행위였다면, 그는 친생자녀에게도 학대의 가해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본격적으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 것은 자신의 양육기술이 두 번째 아이에게 잘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점부터였을 것입니다.

생후 7개월, 그러니까 일반적인 아기들이 낯가림을 시작하는 월령이 된 그 아기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울거나 보채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고, 쉽게 달래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1차 양육자는 아이가 왜 이렇게 유난스러운가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짜증이 나고, 화가 나고, 어쩔 줄 몰랐을 것입니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서 문득 첫 학대 행동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아기는 놀라서 잠깐 보채기를 멈추거나 더 크게 울었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미성숙한 양육자는 학대 행위를 계속하게 될 것이고, 점점 더 그 강도와 빈도가 높아졌을 것입니다.

매우 짧은 기간에, 매우 극단적인 수준까지 학대 행위의 수위가 높아졌다는 것이 특기할만한 사항이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아동학대가 이러한 패턴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가해자의 행동을 변호하거나 이해해주려는 시도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더 경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래도 괜찮아'

둘째, 가해자가 '그래도 되는 줄 알고' 아이를 학대했을 것이라는 가설입니다. 이 표현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선 아이를 학대해도 자신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 줄 알고, 아이를 때려도 죽지는 않을 줄 알고, 아이를 때리는 것이 그리 나쁜 일은 아닌 줄 알고 등의 의미입니다.

얼마 전에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D.P.>라는 드라마 시리즈가 있습니다. 마지막 편의 주인공이 된 병사는 군대 생활 내내 자신에게 가혹행위를 한 선임병사가 제대하자 그 집에 찾아가서 납치하고 보복합니다. 그 과정에서 선임에게 묻습니다. "나한테 왜 그렇게 했어요?" 가해자가 답합니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

아니오. 그들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이미 배웠습니다. 사람을 때리면 맞은 사람이 극심한 고통을 느낄 것이라는 것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극단적인 폭력이 가해지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가혹행위를 하다가 적발되면 처벌되고 자신의 인생이 끝장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냥 그 행위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래도 되는 줄 알고' 후임을 괴롭힌 것이 아니라 '그래도 괜찮았으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 와중에 최악의 현상도 발생했습니다. 괴롭히는 행위를 즐기게 된 것입니다.

<D.P.>의 가해자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군대에 다녀온 수많은 한국 남성들이 경험했던 일입니다. 그 가해자들은 사람을 때리면서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러고 나서 자기들끼리 킥킥거리기도 했습니다. 그 아이를 살해한 입양모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패턴을 보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어린 아기를 학대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아이를 학대하는 것은 범죄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 행위가 탄로 나면 처벌받게 된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죽기 전까지, 그는 '이래도 괜찮아'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이를 학대하고도 남편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키득거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시점에서든 그에게는 '이러면 절대 안돼!'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필요했습니다. 그 메시지를 누가, 언제, 어떻게 전달했어야 할까요? 이 질문이 세 번째 답변으로 연결됩니다.

셋째, 가해자는 '아무도 말리지 않아서' 학대 행위를 계속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들이 개신교 목사의 자녀였으며, 개신교 배경을 가진 대학에서 훈련받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됩니다.

아이를 학대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이 믿고 있다고 생각한 신으로부터 경고의 메시지를 받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그 기간만큼은 그들과 신의 거리가 매우 멀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의 실제 현실에서 그 메시지는 누가 보냈어야 할까요?

방관자는 결국 '협력자'

그 아이를 지켜줬어야 마땅한 첫 번째 '주체'는 입양부일 것입니다. 그가 상식적인 인간이었다면, 건강한 아버지였다면, 자기 아내의 악행을 막았어야 합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아이를 학대하는 행위를 막았어야 하며, 자신이 막을 수 없었다면 공권력을 활용해서라도 막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그도 제한적이지만 법의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배우자의 폭력이나 학대나 범죄 행위를 막지 못하거나 막지 않는 것이 이 사건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는 점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 땅 위의 가정과 학교, 직장, 사회집단, 지역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폭력에는 '방관자'들이 있습니다. 방관자들 스스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많은 대안들이 있으므로, 방관자는 결국 '협력자'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만 한 줌의 용기가 필요할 뿐입니다.

두 번째 주체는 아동보호전문기관과 입양기관의 실무자들입니다. 둘 다 사회복지사들입니다. 그들에게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 당시 아동보호전문기관과 입양기관에는 부모나 가정으로부터 아동을 분리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가정방문을 거절한다 하더라도 강제로 집을 찾아가서 문을 열고 아이의 상태를 확인할 권한이 아동보호전문기관에도 입양기관의 실무자에게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필수적인 의무사항으로 되어 있었지만, 부모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처벌을 받을 강제조항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동학대 신고를 받고 나갈 때는 경찰관이 동행하지만, 사후관리를 할 때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부모가 거부하거나 피해 다닌다면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대를 당한 것이 분명한, 그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어야 한다는 주장을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그 실무자들도 그것을 알고 있으며,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세 번째 주체는 아동학대 신고의무자들입니다. 다행히도 이 사건에서 신고의무자들(어린이집 교사와 원장, 소아과 의사 등)은 모두 아동학대 사실을 발견하고 아동보호서비스 체계에 신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아이를 구해낼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실패했습니다. 해당 신고의무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네 번째 주체는 이웃들입니다. 이 사건이 대중매체를 통해 보도되고 회자된 이후에 여러 '이웃'들이 죄책감을 느낀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때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왜 그 일을 막지 못했을까? 그 일이 벌어진 후에 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까?' 등등의 생각들이 떠오르고 죄책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일반 시민들도 이 사건과 유사한 다른 사건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찌 이 사건만 그렇겠습니까?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수많은 슬프고, 고통스럽고, 불행한 사건들에 대해 우리는 감정이입을 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아파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무고하게 목숨을 잃었는데, 그에 대해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바로 그 사람이 악인일 것입니다.

이러한 죄책감은 자연스럽고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되며, 바람직한 방향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문제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더 악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를 잃은 뒤에라도 외양간을 고쳐야 합니다. 이제 외양간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고민할 차례입니다.
#양천입양아동 #아동학대 #은밀한 맥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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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현상의 은밀한 맥락과 패턴을 탐구하는 질적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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