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발포만호 경험이 '신의 한 수'였던 이유

발포만호 이순신... 지휘관이 지녀야 할 식견 획득, 목민관 자질 연마, 관료사회 명망 고양

등록 2022.03.22 15:00수정 2022.03.2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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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포진은 육군 경험만 했던 이순신이 수군 지휘관이 되어 조선수군 최고 지휘관이 될 자양분을 쌓은 곳이다. 상관의 명령으로 앞뜰의 오동나무를 베려하자 이순신은 "이것은 관청의 물건이요. 또 여러 해 길러 온 것을 하루아침에 베어 버릴 수 없다"며 거절했다. 공사가 분명한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 오문수



임진왜란 당시 맹활약했던 고흥 수군진을 찾는 세 번째 목적지는 발포진이다. 사도진을 떠나 발포진을 향해 운전하면서 떠오르는 생각 하나. '이순신의 발포만호 근무에 이은 전라좌수사 근무는 '조선을 구하라!'는 하늘의 뜻'이었을 것이다. 육군만 경험했던 그가 수군 전투지휘관이 되어 바다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발포진은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에 있다. 발포진은 북쪽에 수덕산을 두고 좌측 동남에 나로도와 우측 서북 쪽에 반도가 뻗어 발포 앞바다를 에워싸고 있다. 남방 해상에 발대곡, 남방 왼쪽 맞은편에 오동도, 바른편에 새우섬, 조금 떨어진 곳에 곰섬이 있어 호수처럼 잔잔한 천연 양항을 이룬다. 이웃한 서쪽 녹도진, 동북쪽 사도진 등과 더불어 전라좌수영을 에워싸고 있는 요충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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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발행한 <전라좌수영>지에서 발췌한 발포진 사진으로 앞바다를 관망할 요처에 자리하고 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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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지방지도에 그려진 <흥양현발포진지도> 모습 ⓒ 오문수

 
발포진은 세종 21년(1439년) 4월에 수군 만호진으로 승격되어 관방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후 성종 21년(1490년) 9월에 둘레 1360척, 높이 13척의 발포만호진성이 축조되었다.

발포진은 조선초기에는 대맹선 1척, 중맹선 3척, 소맹선 3척, 무군소맹선 4척을 보유하다가 전선으로 교체가 이뤄지면서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을 폐진 시까지 유지했다. 발포진은 전라좌수영 휘하 수군진에서 유일하게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순신의 발포만호 근무 경험은 왜란으로부터 조선을 구해낸 수군 경력 체험장이라 할 수 있다.

이순신의 발포만호 근무는 조선 바다를 호령할 천우신조의 첫걸음

32살의 늦은 나이에 무과에 합격해 54살 때 노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 23년간 벼슬살이를 한 이순신은 15년간 북쪽과 남쪽의 변방을 전전하면서 하급 관리 생활만을 계속했다. 그의 성격이 너무 강직하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때로는 파직당하기도 하고 사병으로 강등되어 백의종군 하는 고난을 겪기도 했다.

이순신은 선조 13년(1580년)에 발포만호로 부임해왔다. 이순신의 발포만호 부임은 세 가지의 커다란 의미가 있다. 첫 번째가 이순신 최초의 수군 경험이다. 이순신은 1576년 겨울 동구비보권관으로 첫 벼슬길에 오른 이후 훈련원 봉사, 충청 병사의 권관을 거치면서 육군만 경험 했다.


두 번째는 벼슬길에 올라 처음으로 일선 지휘관 생활을 하였다. 그동안은 지휘관을 보좌하는 역할에 머물렀지만 발포만호로 부임하면서 한 개의 진을 지휘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마지막으로 전라좌수영과의 인연이다. 이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의 5관 5포의 절반이 넘는 1관과 4포의 진이 존재한 고흥에 부임해 바닷길, 인맥, 지역 실상을 파악하는 데 더없이 소중한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발포만호로 부임해 18개월간 근무하며 행한 기록은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쓴 <행록>에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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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한 발포진 성벽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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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성벽돌 모습 뒤에 복원된 발포진 성벽이 보인다. ⓒ 오문수

 
감사 손식이 참소하는 말을 듣고 공에게 벌을 주려고 하여 순행차로 능성(현 화순 능주)에 와서 공을 마중오라 불러다가 진서에 대한 강독을 끝내고 또 진도(陣圖)를 그리게 하자 공이 붓을 들고 정묘하게 그려 내니 감사가 꾸부리고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어쩌면 이렇게도 정묘하게 그리는고" 하며 그 조상을 물어보고 "내가 진작 몰랐던 것이 한이라"하고 그 후로는 정중하게 대우하였다.
 
위에 거론된 사례를 보면 이순신이 병법에 능통하고 군사적으로 탁월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지휘관들에게 이순신을 각인시킨 계기가 됐다. 조카 '이분'이 쓴 <행록>에 연이어 기록된 글을 보면 공사 구분이 명확했던 이순신의 공직관을 알 수 있다.
 
좌수사 '성박'이 발포로 사람을 보내어 객사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다가 거문고를 만들려 하므로 공은 허락하지 않으며, "이것은 관청 물건이요. 또 여러 해 길러 온 것을 하루아침에 베어 버릴 수 있을 것이냐" 하고 돌려보내니 수사가 크게 성내었으나 감히 베어가지는 못하였다. 

발포만호 직을 수행하며 훌륭한 지휘관이란 것을 관료사회에 각인시켜 이순신의 존재감을 보여준 사건도 있었다. 조선 시대 관리를 감찰하는 역할을 맡은 도사(都事) '조헌'이 중앙 관료들에게 한 말을 '이분'이 <행록>에 기록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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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보이는 유물전시관은 사도진 객사를 뜯어 옮긴 건물이다. 유물은 현장에 있어야 가치가 두드러지지만 대부분 유물이 사라진 사도진 객사가 이곳에서 보존되고 있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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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선정비 뒤에 이은상이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쓴 공적비가 보인다 ⓒ 오문수

 
 수사와 감사가 같이 모여 관리들의 성적의 우열을 심사하면서 공을 맨 아래에 두려하자 중봉 '조헌'이 도사로서 붓을 들고 있다가 쓰지 않고 하는 말이 "이 아무의 군사를 어거하는 법이 이 도에서는 제일이라는 말을 들어 왔는데 다른 여러 진을 모두 아래에 둘망정 이 아무는 폄할 수 없을 것이요" 하여 그만 중지하였다.
 
보복 차원의 징계를 받아 이순신은 18개월 만에 발포만호에서 파직당했다. 이순신은 1589년 정읍현감에 이어 몇 군데 수군 지휘관으로 임명된 후 유성룡의 천거로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591년 2월에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다.

육군으로만 근무했던 이순신이 전직해 수군 지휘관이 된 발포만호 경력은 조선 바다를 호령할 수군 최고 지휘관의 밑거름이 되어 바람 앞에선 등불처럼 위태로웠던 조선을 구한 신의 한 수였다.
덧붙이는 글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발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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