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친미 서부와 친러 동부의 분단 과정

등록 2022.03.23 11:19수정 2022.03.23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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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는 수도 키이우(키예프)를 관통하는 드네프르 강을 기준으로 동서로 나눈다. 동쪽은 수백 년 동안 지배해 온 러시아에 가까운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반면 서쪽은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는 동안 유럽에 가까운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 잠깐 동서 우크라이나가 각각 독립한 후 통일을 선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동쪽은 1919년 소련에 편입되어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됐다. 서쪽은 1922년 폴란드에 편입됐는데, 2차 대전 때 소련이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 서부를 해방시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편입시켰다.

스탈린이 조지아,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 출신인 것에서 보듯이 소련에서 소수 공화국에 대한 차별이 심한 편은 아니었고 각 공화국에 높은 자치권을 부여했다.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에 우호의 상징으로서 러시아인이 다수인 크림반도를 할양하기도 했다.

소련에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벨로루시 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유엔에 가입하는 등 높은 수준의 독자성을 인정받았다. 우크라이나는 경제적으로도 번영했고 핵무기를 비롯하여 군사강국이었다. 소련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는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추락했다.

미국의 개입 이전에 권력을 공유해 온 동서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는 독립 이후 친러인 동부와 친유럽인 서부가 나름 권력을 공유하면서 민주적으로 정권을 교체해왔다. 1991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자, 우크라이나의 초대 대통령은 레오니드 크라프축(Leonid Kravchuk)이다.

그는 폴란드에 점령당했던 우크라이나 서부의 농부이자 폴란드 기병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무소속이었다. 반면 1994년부터 2004년까지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속했던 우크라이나 북동부 출신의 레오니드 쿠츠마(Leonid Kuchma)이다.


동서부 출신 정치인들은 권력 강화와 국가의 통일성을 위해 한쪽이 대통령을 하면 다른 쪽을 총리로 수용했다. 동부 출신 쿠츠마는 서부 출신 레오니드 크라프축 대통령 밑에서 총리를 맡았다.

우크라이나 언어권 출신의 은행가로서 친유럽적인 빅토르 유셴코(Viktor Yushchenko) 역시 1999년 동부 출신 쿠츠마 대통령 밑에서 총리를 맡았다. 친러인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 역시 쿠츠마와 유셴코 시절인 2002년부터 2005년까지, 2006년부터 2007년까지 총리로 재직했다.

유셴코, 친서방정책으로 친러적인 공산당과 올리가르히와 충돌

소련 붕괴 이후에도 우크라이나에서 공산당이 의회 다수당을 유지했고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미국과 나토는 동유럽에 진출하는데 있어 장애요소인 공산당과 신흥 재벌인 올리가르히 (Oligarch)를 비판해왔고 친미인사들은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다.

특히 미국과 나토는 가입 가입의 선결조건으로서 친러적인 공산당과 올리가르히에 대한 통제를 요구해왔다. 유셴코는 총리 시절 친 서방적인 경제개혁정책을 추진하여 친러 경향의 공산당과 올리가르히들과 충돌했다. 유셴코 총리는 결국 2001년 불신임 투표를 통해 사임된 후 우리 우크라이나에 입당했다.

그후 유셴코는 인기 있는 여성 정치인이자 친서방적인 기업인인 율리야 티모셴코(Yulia Tymoshenko)와 정치적 연합을 함으로써 유력한 야권 대통령후보가 됐다. 반면 친러성향의 야누코비치는 독재자라고 비판받던 레오니드 쿠츠마의 후계자로서 2004년 총리 재직 도중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1차 투표에서는 근소한 차로 유셴코가 앞섰으나, 결선에서 야누코비치가 49.46%의 득표로 당선됐다. 하지만 선거 부정이 개입되었다는 이유로 유셴코 후보 지지자들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이러한 오렌지혁명을 거쳐 12월 26일 재선거가 실시되어 결국 유셴코가 다수표를 얻어 대통령 당선자로 발표됐다.

유셴코의 부인, 제3세계 체제전환 추진하는 미국 외교관 출신

유셴코의 부인 카테리나 유셴코(Kateryna Yushchenko)는 시카고에서 태어난 우크라이나계 미국인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2차 대전 당시 독일에 포로로 잡혀왔다가 미국의 우크라이나정교회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서 자수성가를 했다.

유셴코의 부인은 제3세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명분으로 체제전환을 추진하는 미국 국무성의 인도주의와 인권담당 부차관의 특별보좌관이었다. 그녀는 레이건과 부시 대통령 밑에서 일했다. 그녀는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미국에서 미국-우크라이나 친선재산을 설립하였으며 유셴코를 비롯한 은행가들을 훈련시켰다.

유셴코의 부인은 2004년 그녀의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미국의 시민권을 유지해 국내외 비판을 받았다. 그녀가 2005년 우크라이나 시민권을 얻은 이후에도 친러 세력은 그녀를 유셴코를 배후 조정하는 미국의 고위첩자로 수차례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다만 이러한 명예훼손에 대해 그녀는 우크라이나 법정에서 승리했다.

유셴코, 권력 독점 위해 두 차례나 국회 해산시켜 정국 혼란 초래

총리에서 쫓겨난 야누코비치가 이끄는 지역당은 2006년 총선에서 제1당이 됐다. 그는 친러시아 성향의 다른 당들과 연정을 구성하여 다시 총리가 됐다. 유셴코 대통령은 정국 안정을 위해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수용했다.

그런데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유셴코 대통령은 권력 독점을 위해 2007년 4월 국회를 해산하고 조기선거를 했다. 하지만 야누코비치의 지역당이 여전히 조기 총선에서 제1당을 유지했다. 다만 율리야 티모셴코가 다른 당들과 연정을 구성하여 야누코비치를 물리치고 총리가 됐다.

그런데 티모셴코 총리가 더 과감한 친서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이번에도 유셴코 대통령과 티모셴코 총리가 차기 권력을 놓고 대립했다. 유셴코 대통령은 다시 국회를 해산하고 재선거를 실시하여 티모셴코를 해임하고 자신의 경쟁자였던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임명했다.

동부에서 인기 있던 야누코비치 정부를 전복 시킨 후 동서가 대결

2010년 대선에서 동남부를 기반으로 한 야누코비치가 1차투표에서 1위에 올라 2차투표에서 48.95%의 득표율로 경쟁자였던 티모셴코를 꺾었다. 유셴코는 5.5% 득표에 그쳤으며 2012년 총선에서 우리우크라이나 소속의 정당명부로 출마했으나 1.11% 득표에 그쳐 사실상 정계에서 퇴출됐다.

기업가였던 티모셴코는 그후 자신과 자신의 일가가 얽힌 부패 사건으로 구속됐다. 이에 2012년 유럽연합은 부패 혐의로 수감된 티모셴코의 석방을 요구하고 우크라이나의 법제도 개선을 유럽연합 가입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에 친서방 세력은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의회에게 법개정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유로마이단은 유로(Euro)와 시위가 집중되는 키이우의 중심 광장인 독립광장 마이단(Maidan)을 따서 지어졌다. 2013년 11월 21일 야누코비치가 유럽연합 가입 추진을 중단하고 러시아와의 경제 협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그는 흑해에 주둔한 러시아 해군의 철수 시한을 2042년으로 연장시켰다.

이에 11월 25일 키이우에서 유럽연합 가입을 다시 추진할 것을 촉구하고 친러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시작됐다. 12월 1일 극우파를 중심으로 폭동이 발생하여 정부가 이를 진압했다. 미국과 서방의 정부는 시위대 편에 서서 친러 우크라이나 정부의 폭력성, 인권침해, 부패 등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에서 친러와 친미 진영은 서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2013년 12월 3개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들의 45%~50%가 유로마이단을 지지하고 있으며, 42%~50%가 반대했다.

친미세력이 극우세력의 무장쿠데타를 기회로 삼아 정권 장악

12월 동안 친미진영의 시위와 극우세력의 폭동이 계속됐다. 2014년 1월 23일부터 유로마이단이 서부 우크라이나 주 정부청사 및 지역의회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1월 25일부터 일반 시위대들의 요구가 인권 탄압, 권력 남용, 부패, 폭력 진압에 대한 항의로 확산됐다.

2014년 2월 18일 키이우에서 우크라이나 헌법을 친미정부 시절인 2004년의 헌법으로 복귀시킬 것을 요구하는 폭력 시위가 발생했다. 이 시위에서 75명이 죽고 천여 명이 부상당했고,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다행히 정부와 야권, 시위대는 휴전에 합의했으나 폭력 시위를 주도해온 우크라이나 자유당 등 극우 시위대는 합의안을 거부했다. 나아가 이들은 무장봉기하여 수도를 장악했으며,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러시아로 망명했다. 이후 친미 성향의 야권이 의회 주도권을 잡고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탄핵했다.

반러정책으로 크림반도 독립, 동부는 내전 상태 돌입

야누코비치가 동부 도네츠크 주지사 출신이었기 때문에 친러 지역인 동부지역은 야누코비치의 망명 이후에도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했다. 또한 서부의 친미시위에 대응하여 친러시위가 우크라이나의 남동부에 확산됐다.

특히 돈바스 지역의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이 분리주의를 제창하며 독립함에 따라 정부군과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크림반도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는 크림반도의 러시아계 주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크림반도를 점령했다.

2014년 크림 자치공화국 주민투표에서 전체 유권자 가운데 96.77%가 크림 자치 공화국이 우크라이나에서 독립하여 러시아로 복귀하는 것에 동의했다. 다른 동부의 분쟁지역에선 내전 끝에 민스크협약이 두 차례 체결돼 휴전상태로 전환됐다.

우크라이나에서 친러 지역이 독립하거나 이탈한 이후 우크라이나 정치는 친미세력이 독점했다. 러시아어를 공용어에서 빼는 등 탈러시아 정책이 진행됐다. 2014년 대선에서 재벌이자 은행가인 페트로 포로셴코가 결선투표 없이 과반수 득표로 당선됐다.

포로셴코는 유럽연합 가입, 탈러시아, 중앙집권, 자본주의 강화 등을 추진했고 러시아와 전쟁 끝에 민스크 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우크라이나는 유럽연합과의 협력을 확대하였고 2018년에 다시 러시아와 군사충돌이 발생했다.

한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유대인 출신으로서 '국민의 일꾼'이라는 정치드라마에서 대통령으로 출연하여 인기를 얻었다. 그는 친미 반러 시위를 지지했으며, 드라마와 같은 이름의 '국민의 일꾼'이라는 정당을 창당했다. 2019년 대선에서 젤렌스키가 결선투표에서 25%에 그친 포로셴코를 꺾고 당선됐다.
#우크라이나 #빅토르 유셴코 #빅토르 야누코비치 #오렌지혁명 #유로마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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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에서 12년간 기관지위원회와 정책연구소에서 일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관계』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 『연방제 통일과 새로운 공화국』, 『미국은 살아남을까』, 『코리아를 흔든 100년의 국제정세』, 『 마르크스의 실천과 이론』 등의 저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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