쳇바퀴 도는 것 같아도... 나는 사람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

[마흔이 서글퍼지지 않도록] 항공기 소프트웨어 개발자, 일의 기쁨과 슬픔

등록 2022.04.11 14:32수정 2022.04.11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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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 소프트웨어 개발 15년 차로 접어들었다. 15년. 이렇게 오랫동안 한 분야에 몸 담게 될 줄은 몰랐다. 다른 하고 싶었던 것도 많았던 것 같은데 적성에 맞는지 길게도 이어왔다. 뼈를 묻겠다는 말이 아무래도 씨가 된 것 같다.


직장인 대부분이 그러하듯 반복적으로 하는 일이 참 많다.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 대다수다. 이 일을 한다고 대단히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하루 일과의 일부분은 다람쥐 쳇바퀴를 돌리는데 할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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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쳇바퀴를 돌리는 직장인 ⓒ 남희한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쳇바퀴에 해당하는 업무라면 시험과 검증이다. 갖가지 시험 절차를 통해 기능이 제대로 동작하는지, 문제는 없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항공기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이 과정은 특히나 중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의 작은 결함이 항공기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기에 까다롭고 반복적인 과정이 중첩적으로 대기하고 있다. 개발자의 체감 상 무한 반복이라고 느낄 정도로 지난한 검증 과정이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시스템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시스템도 사람의 손이 어느 정도 닿아야하다 보니 실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PC에서 확인하고 실험실에서 확인하고 항공기에서 확인하고 또 PC에서 확인하고... 그렇게 확인을 거쳤음에도 어디선가 또 문제는 생겨난다. 순차적이고 반복적인 검증절차가 있는 이유다.

확인에 또 확인에 또 확인.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신뢰는 없다. 작은 변경 하나가 발생해도 그와 관련된 모든 시험을 다시 수행한다. 이럴 때면 이건 좀 정도가 지나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지만, 그 과정에서 발견된 문제를 직면하면 정도(程度)를 따질 것이 아니라 정도(正道)를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바로 든다.

불의의 사고들

올해 들어 두 번째 모금 메일을 받았다. 연초에 F-5계열 전투기가 추락했고 얼마 전 훈련 중이던 KT-1 두 대가 불의의 사고로 추락했다. 관련 뉴스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 가정을 꾸리고부터 누군가의 죽음에 자꾸만 그들의 가족이 그려진다. 급격히 치솟는 감정을 숨기는 게 쉽지 않다. 나이가 들어 감정의 막이 많이 얇아졌는지 자꾸 눈물이 새나온다.


뭐가 문제였을까? 직업적인 의문이 자연스레 오가고 안타까운 마음에 인터넷 여기저기를 찾아보지만 안타까움만 더해진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갔길, 그들의 인연들이 잘 견뎌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성금 신청 답장을 보내고 냉기가 슬며시 자리 잡은 마음을 추스르며 업무를 이어간다. 따뜻한 물 한 모금으로 가슴을 데우며 지금 내가 개발하는 항공기도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가, 한 가정의 가장이 탈 수 있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성금 말고도 있음을 깨닫는다.

항공기의 성숙도를 높이기 위해 해야 하는 수많은 반복에 가끔은 의구심을 품고 번거로워했던 내 모습이 자못 부끄럽다. 먹고사니즘으로 하는 일이라지만 내가 하는 일에 부여한 의미가 너무 작은 것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단순한 밥벌이가 아닌 한 생명을 안전하게 지키는 일이고 그를 통해 한 가정을 지키고 더 나아가 나라를 지키는 데 일조한다고 생각해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텐데, 내 일을 너무 단편적으로만 생각했다.

의미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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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바퀴가 아닌 톱니바퀴 ⓒ 남희한

 
어차피 해야 하는 일, 이왕이면 좋은 의미를 부여해 본다. "사람을 지키는 일" 혹은 "사람을 살리는 일"... 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대단한 일에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은 꾸역꾸역 해나가던 번거로운 일을 충실히 해나갈 수 있게 한다.

무의미해보였던 일의 결과로 의미가 슬며시 배어나오면 입가엔 미소가 슬며시 배어나온다. 어느새 일단락된 일들을 정리하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는 뿌듯함을 느낀다. 마음이 편안하다.

이번 기회에 결함을 대하는 태도도 바꿔본다. 결함을 접하면 여전히 탄식이 나오고 주변 눈치가 보이지만, 내가 신경 쓸 것은 나나 주변인의 걱정스러운 시선과 책망 어린 말이 아니라 결국에는 작은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결과물임을 떠올린다.

결함이 발견될 때마다 위축될 것이 아니라 안도해야 하는 이유는, 개발 중에 발견된 결함은 더 커졌을 수도 있는 나중의 결함을 미연에 방지한 다행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호미로 막으면 가래 쓸 일은 줄어들게 되어 있으니까.

오늘도 호미로 막을 일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여전히 쳇바퀴는 돌아간다. 부지불식간에 터져 나오는 한숨을 다급히 줄이며 되뇐다. 맡겨진 소임에 최선을 다하자고. 나의 최선이 부디 가슴 아픈 일을 줄이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됨을 잊지 말자고. 그 과정에서 느끼는 여러 불편함과 귀찮음은 그저 직장인으로서의 한탄으로 매듭짓자고.

컴퓨터 모니터에 시험 시간임을 알리는 알람 메시지가 깜빡인다. 실험실에 박혀야 할 시간이다. 평소 같으면 어기적거렸을 몸을 재깍 일으킨다. 발걸음이 여느 때와 다르게 사뭇 비장하다.

나는 지금, 굉장히 대단한 일을 하러 간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마흔이서글퍼지지않도록 #그림에세이 #항공기사고 #일의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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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렀지만 넌 또 모르잖아"라는 생각으로 내일의 나에게 글을 남깁니다. 풍족하지 않아도 우아하게 살아가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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