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지리산, 나무들은 목이 마르다

실상사 3암자 순례 템플스테이 소감

등록 2022.05.30 10:10수정 2022.05.30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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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마지막 주말, '실상사 3암자 순례 템플스테이'에 왔다. 한 달 만에 다시, 고요하다. 업무 일정을 기록하는 5월 탁상 달력은 더 이상 쓸 곳이 없을 만큼 빽빽하다. 5월은 이렇게 가고 있다. 멈추고 싶고, 듣고 싶고, 걷고 싶다. 실상사 템플스테이는 시간을 멈추게 한다. '잠깐, 생각 좀 해보자. 이렇게 바쁘게 사는 것이 괜찮은 일인가? 좋은 일인가? 그것이 너의 삶의 완성도를 높이는 길인가? 혹시 말이야, 아니면 어떡하지?'

약사전 앞 '돌 쉼터'에 앉아서 나무에게 물어본다. 느티나무가 바람과 상의하더니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해준다. '아니다. 괜찮지 않다. 너에게도, 네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실상사에 오면 들린다. 나무와 바람이 들려주는 말이 또렷이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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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약사전 앞 느티나무 - 시간을 멈추게 하는 ‘돌 쉼터’ ⓒ 강부미


저녁 공양 후 법인 스님과 차담 시간, 휴휴당 담장 너머 논에서는 개구리들이 저녁 법석 중이다. 우리는 스님의 지혜를 듣고자 마음속에 담아온 고민을 풀어놓는다. 법인 스님 말씀은 한없이 온화하고 부드러우나, 때로는 냉철한 직설이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뒤엉킨 것들을 통찰하게 하신다. 단 한마디도 놓칠 수가 없다. 글에서 나온 말이 아닌 삶에서 나온 실천이기에 그 무게와 기품이 다르다.


- 주변 사람들의 말에 상처를 받습니다. 저 역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느낌을 사실처럼 말한다면,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달리는 말'이 됩니다. 느낌을 사실처럼 계속 말하면 느낌은 결국 사실이 되어버립니다. 그 순간 말은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에게 독이 됩니다."

- 요즘은 가족 모두 스마트폰에 길들여집니다. 제 자신부터 너무 많이 들여다봅니다.
"'화면'에서 '대면'으로의 전환이 절실합니다. 화면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사는 우리는 이제 대면으로 살아가도록 눈을 돌려야 합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영상의 잔상에 무섭게 중독됩니다."

- 책에서 좋은 글귀를 만나도, 다른 사람에게 좋은 말을 들어도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다.
"언어는 마음으로 들어올 때 비로소 제 역할을 합니다. 글을 읽을 때, 말을 들을 때 한마디 한마디가 깊숙이 들어와야 합니다. '지금 당장 고귀하고 진실하고 겸허한 사람이 되겠습니다'라는 글을 읽으면, 지금, 당장, 고귀, 진실, 겸허라는 단어가 내 마음 속으로 천천히 들어와야 합니다. '평화롭고 소탈하고, 소박하게 행동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평화, 소탈, 소박, 행동이라는 말이 내게 깊숙이 들어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글은, 말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괴롭습니다. 인정해 주지 않으면 자존심이 상하고 상처를 받습니다.
"무심하게 '오직 할 뿐'이어야 합니다. 남이 알아주는 것은 보너스입니다.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그 마음, 그 마음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이 거추장스럽고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훌훌 던져 버릴 수는 없을까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이미 스스로 거룩하게 되고 있습니다."

-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것은 잘 알지만,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을 챙긴다는 것은 내 생각의 구조를 바꾸는 것입니다. 이 욕심이 어디에서 왔는지 들여다보고 내 생각을 진단하면서 잘 다루는 방법을 연습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지만, 마음을 바꾸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기도 합니다."


스님과의 차담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 속에서 나는 어떻게 우리가 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등불 같다. 잠이 오지 않는다. 선선한 저녁 바람에 마음이 두근거린다.

둘째 날, 실상사-서진암-백장암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3암자 순례길'을 걷는다. 올해는 지리산 둘레길 전체 스물한 개 구간이 모두 개통되어 둥그런 원으로 이어진 지 십 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사단법인 숲길' 활동가님들이 전 구간에서 따로 또 같이 걷는다. 지리산을 지키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우리도 '지구마을 평화 순례 소원문'을 읽고 의미를 새기며 순례길에 오른다. 활동가님들은 산길에서 '숲길' 동지들을 만나고 반가워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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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숲길’ 활동가님들과 함께 - ‘지구마을 평화 순례’를 시작하며 ⓒ 강부미


4월 지리산과 5월 지리산은 너무 다르다. 한 달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고 한다. 나무들은 서로의 생명을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견디지 못한 약한 나무들은 바싹바싹 타들어간다. 4월에 싱그럽고 보드라운 연두빛이었던 나무들이 손만 닿으면 바사삭 부스러질 것처럼 안쓰럽게 말라가고 있다. 마음이 안 좋다. 언제부터 숲에 나무가 말라가는 것이 내 눈에 밟혔을까. 숲길도 촉촉함이라고는 없이 흙이 바짝 말랐다.

마른 솔잎 가지에 미끄러진 여덟 살 선재는 뒤따라 내려오는 어른들을 위해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솔가지를 부지런히 치워준다. 뒷사람의 안전한 산행을 염려해주고, 걸으면서 나무와 풀이름을 다정하게 알려주며, 며칠 전에는 모내기도 도왔던 이 아이, 공동체가 함께 키운 산내 아이들은 이렇게 자라고 있다. 다행이고 고맙다.

타들어가는 5월 지리산을 걸으며 도법 스님이 말씀하신 '나의 완성과 사회의 완성'이 떠오른다. 기후 위기라는 거대 담론 앞에 한없이 무기력한 한 개인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고 싶다.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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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숲길’ 활동가님들과 지리산 3암자 순례길을 걷다. ⓒ 강부미


저녁 공양 후, 법인 스님을 다시 뵈는 호사를 누린다. '힘들었지만 참 좋은' 순례길의 느낌을 나누고, 실상사 약사여래 천일 기도문, '꼭꼭 눌러 쓰는 붓다의 지혜'를 읽는다. 마음에 들어온 구절을 펜으로 쓰고(사경), 의미를 나누면서 새기는 시간을 갖는다. 싱잉볼 울림과 함께 고요하고 평온한 침묵의 세계로 들어간다.

얼마만의 침묵인가. 침묵이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침묵을 경험하니 침묵이 좋은 것을 안다.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법문을 따라 쓰는 사각사각 붓펜 소리만 감돈다. 한참 후, 사경한 법문을 함께 나눈다. 법인 스님은 원감 충지 스님의 시를 선택하신다.

날마다 산을 봐도 자꾸만 보고 싶고
때때로 물소리는 들어도 물리잖네.
저절로 귀와 눈이 모두 맑고 상쾌하여
듣는 소리 보는 모습에서 고요함을 기르리라.

담장 너머 논에서 들려오는 개골개골 소리를 배경 삼아 스님이 시를 읽어주신다. 해설은 더 좋다. 마지막 행의 '고요함'은 자신의 삶을 평화롭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힘이라고 하신다. 세상 그 어떤 인문학 강의가 이보다 더 품격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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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 스님과 함께 ‘약사여래 천일 기도문’을 사경하고 소감을 나누다. ⓒ 강부미


셋째 날, 덕산 스님의 도움으로 농사일 수행을 한다. 농부 덕산 스님은 그토록 온화한 미소를 한결같이 머금고 계신다.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최고의 수행임을 온몸으로 깨닫는다. 양파밭에서 마늘종을 뽑고, 하우스에서 케일, 양상추, 쑥갓을 뜯어서 공양간에서 씻어 공동체 식구들 점심 공양에 올린다.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면 마음이 한가로워진다는 법인 스님 말씀이 정말 맞다.

도법 스님, 법인 스님, 덕산 스님, 상연 스님, 마음 주신 실상사 스님들, 백장암에서 밥과 차를 나눌 수 있게 해주신 따듯한 행선 스님, 아름다운 순례길을 함께 걸었던 마을 활동가님들, 꿈이야님, 자경님, 정성 어린 공양을 준비해주신 공양주님, 속 깊은 대화를 함께 나눈 휴휴당 식구들, 아침 법석에서 만난 '온 배움터' 청년들, 순례길 길잡이가 되어준 귀여운 선재, 고맙고 고맙습니다. 그리고 나의 극심한 강아지 공포증을 극복하게 도와준 순둥이 다동아, 정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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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일 수행을 마치고 - 뒤편에 실상사 공동체에서 함께 모내기한 논이 보인다. ⓒ 강부미

덧붙이는 글 '실상사 3암자 순례 템플스테이'는 실상사-서진암-백장암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순례길입니다.
#실상사 #법인스님 #3암자순례 #지리산 #템플스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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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초등수석교사, <가르침을 멈추니 배움이 왔다>, '배움의공동체 연구회' 회원으로 아이들, 선생님들과 즐겁게 배우고 있습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다양한 실력이 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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