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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 만의 만남... 그러나 1200명 목숨 거둔 숲은 말이 없다

6·25 당시 학살 현장 김천 돌고개에서 열린 '희생자 추모제' 참관기

등록 2022.07.18 09:37수정 2022.07.18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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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 추모제는 김천지역에서 역사를 공부하다 임종업과 그가 감당해야 했던 이 땅의 아픈 현대사를 만난 시민들이 마련했다. ⓒ 장호철


지난 14일 오전 11시,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폐교된 지례중학교 구성분교장 맞은편 산어귀, 돌고개에서 추모제가 조촐하게 베풀어졌다. 1950년 7월 14일, 이 숲 부근에서 학살된 독립운동가 임종업(林鍾業, 1907~1950) 선생과 1200명의 억울한 넋을 위로하고 기리는 자리였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임종업 선생과 희생자 추모제

임종업은 5·16 쿠데타 직후 북의 밀사로 내려왔다가 처형된 황태성(1906~1963), 박정희의 셋째 형인 박상희(1906~1946)와 함께 경북지역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3인방' 가운데 한 사람이다. 당시 김천시 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해 있던 임종업은 1200여 명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이 숲 어름에서 학살되었다. 그때, 그는 마흔셋의 장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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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어귀에 세우려 했던 ‘김천 국민보도연맹 사건 및 김천 형무소 사건 희생지’ 안내판은 지역 이장들의 반대로 산속 인적 없는 곳으로 밀려났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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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이 이루어진 현장 구성면 광명리 대뱅이재 옛길. 지금은 새 도로가 나면서 터널이 뚫렸다. ⓒ 장호철

   
미 24사단 방첩대(CIC)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김천지역에서 예비검속된 주민은 1200여 명이었다. 이들은 김천경찰서 유치장에 200여 명, 김천 소년형무소에 1000여 명이 수용됐다가 1950년 7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에 총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50년 7월, 예비검속 주민 1200명 즉결처분으로 학살

2008년 진실과화해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1950년 7월 14일, 특무대(CIC)와 헌병대는 이들을 산골짜기로 끌고 가 구덩이를 파게 한 후, 일렬로 세워놓고 총살하고는 그냥 흙으로 덮어 버렸다고 한다. 김천시 구성면 광명리 대뱅이재와 송죽리 돌고개 등에서였다. 날림으로 매장한지라, 비가 오면 시신이나 유골이 드러나기도 했다고 한다.

참석한 유족은 임종업 선생의 사위인 권상능 선생(88) 혼자뿐이었다. 나머지는 김천지역에서 역사 공부 모임을 하는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역사를 공부하다 임종업을 선생을 만나고, 그가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이 땅의 아픈 현대사를 만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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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잔을 올리는 권상능 선생. 그는 임종업 선생의 외동딸 임미정의 남편으로 그 일가의 비극을 함께 지고 왔다. ⓒ 장호철

 
임종업은 김천 출신이다. 배재고보에 다니다 동맹 휴교 사건으로 퇴학 처분을 받은 그는 중앙고보로 편입하여 사회과학연구회와 서울청년회에서 활동했다. 6·10 만세운동 때는 격문을 배포하는 활동을 하다 기소유예되기도 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모두 네 차례에 걸쳐 투옥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네 차례나 투옥된 독립운동가 임종업


1928년에 그는 신간회 김천지회에서 활동하였다. 임종업은 황태성과 같이 3차 조선공산당(ML당)에 가입하고 경북도당 조직을 주도했다. 1930년 1월 부산 조선방직에서 파업이 발생하자, 파업 지원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활동으로 검거된 그는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임종업은 1931년 12월 백낙도·김창식 등과 함께 현재의 사회제도를 타파하고 사유 재산 제도를 부인하는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비밀 결사인 김천그룹을 조직하였다. 김천그룹은 1928년 코민테른으로부터 3차 조선공산당 지부 승인이 취소된 이후 최초로 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지역 전위조직이었다. 

김천그룹은 청년동맹원과 소년회 회원 중심의 공개적인 '독서회'와 '노동야학'을 개설하여 공산주의 사상을 확산하려 했다. 1931년 조선운송 김천출장소 인부들의 임금인상 요구 파업(9월)과 경북선 철도 건설공사 노동자들의 임금인상·노동시간 단축 요구 파업(10월), 인쇄노동자들의 동맹파업(11월) 등이 이어지자, 일경은 배후를 의심하고 김천의 활동가들을 수배했다. 

임종업은 김창식·나정운·백낙도와 함께 1933년 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결핵성 척추염이 발병, 1934년 6월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도 그는 그간 조직을 관리해 온 황태성 등과 함께 300여 명의 회원이 독서회와 야학회 등을 운영한 김천그룹 재건협의회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1938년 2월, 조직원 하나가 붙잡혀 김천그룹 재건협의회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조직원 수십 명이 검거되어 황태성 등 25명이 최종 기소되었다.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39년 출옥했다. 1944년에 건국동맹에 참여했으나 일경의 감시는 여전했다. 그는 해방도 경찰서에 구금돼 있다가 맞았다.

해방 뒤, 임종업은 건국준비위원회 김천군 인민위원장으로 선출됐고, 황태성의 여동생인 부인 황경임은 경북 여맹에서 활동했다. 부부는 10월 항쟁에서도 함께 투쟁을 벌였으며, 미군정에 체포돼 임종업 5년, 황경임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국민보도연맹에 강제 가입돼 희생, 일가의 비극은 이어지고

임종업은 1948년에 가서야 가석방됐다. 그는 '국민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됐으며, '김천군 보도연맹'의 간사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보도연맹엔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가입이 강제되거나, 심지어 본인도 모르게 가입된 사례도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군경은 적에게 협력할 가능성을 예단하여 대규모의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임종업의 희생으로 이 일가의 가족사가 가지런해졌다면 좀 좋을까. 그러나 시대는 이들 일가를 역사의 격랑 속으로 떠밀었다. 재심으로 풀려난 부인 황경임(1932~1994)은 남조선 인민 대표자대회에 참석차 북으로 갔고, 열다섯 외동딸 임미정(1932~2021)이 부친의 옥바라지를 해야 했다. 

1948년 9월, 단독정부 반대운동으로 경북여중에서 퇴학당한 임미정은 남로당 경북도당의 주선으로 북으로 갔다. 평양에서 그는 외삼촌 황태성과 어머니 황경임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김일성종합대학 예비과에 편입하였으나,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김일성대학 해방지구 정치공작대'로 선발되어 서울로 내려왔다. 임미정은 서울시청에서 어머니 황경임을 만났으나, 그것이 모녀의 마지막 상봉이었다. 

임미정은 1950년 9월 낙동강 전투에서 낙오되어 김천의 친척 집에 피신했다. 이때 7월에 부친이 학살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북으로 떠나기 전 면회 갔을 때 부친은 꼭 가야 하냐고 물었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 그 목소리를 잊지 못했다고 한다. 임미정은 1951년 9월 상주에서 체포되어 8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 재심으로 1954년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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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권상능 선생은 상주시 청리면에 있는 처외삼촌 황태성 선생의 묘를 찾아 참배했다. ⓒ 구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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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 인사를 하는 권상능 선생의 목소리는 시종 떨렸고, 치미는 감정을 다스리느라 말은 여러 차례 끊어지곤 했다. ⓒ 장호철


임미정이 학창 시절의 동무였던 권상능과 혼인한 것은 1956년 11월이었다. 임미정은 1961년 10월 남편이 황태성 사건으로 구속되자, 감옥에서 배운 자수(刺繡)로 외숙과 남편을 옥바라지했다. 

1963년 황태성이 처형되자, 임미정 내외는 그의 주검을 수습해 고향 상주의 선산에 모셨다. 임미정은 외숙이 지어준 호를 딴 '자하 자수연구소'를 열었다. 대구 출신의 권상능은 경북대 사대 부속중학을 다녔고, 피난지 부산에서 홍익대 사학과에서 한국 근대사를 공부했다. 

그는 이승만 정권의 북진 통일정책을 반대하는 진보적 청년운동조직 '경향회'를 결성, 고 이상두, 김질락 등과 함께 평화 통일운동을 전개했다. 1961년 황태성 사건에 연루돼 2년여 옥고를 치렀다. 1970년 아내와 함께 '조선화랑'을 개관, 같이 운영해 왔으나, 지난해 그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그는 유족 인사를 통해 추모의 자리에 선 자신의 소회를 밝혔다. 그의 목소리는 시종 떨렸고, 치미는 감정을 다스리느라 말은 여러 차례 끊어지곤 했다. 그는 힘겹게 말을 이으면서 떠오르는 고통을 삭이느라, 무진 애를 쓰는 듯했다. 

그는 사위지만 장인인 임종업 선생을 한 번도 뵙지 못했다며 말을 잇지 못했고, 장인을 '좌우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민족의 미래를 위해 헌신'한 분으로 회고했다. 그는 '좋은 나라'를 만들려는 뜻을 모으고 협력하여 좋은 나라를 만들기를 희망한다는 말로 인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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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돌고개. 대뱅이재와 함께 1950년 7월, 특무대와 헌병들이 1200여명을 학살한 현장 가운데 하나다. ⓒ 장호철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진실규명 불능 결정

72년 전의 비극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위원회)의 조사로 그 해원의 첫발을 뗐지만, 위원회에서는 진실규명 불능 결정을 했다. 2009년 김천시와 위원회에서 추모제 자리에 세우려던 '김천 국민보도연맹 사건 및 김천 형무소 사건 희생지' 안내판도 산속,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야 했다. 지역의 이장들이 완강히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음복으로 수박과 막걸리를 나누고 추모제는 끝났다. 72년 만에 추모제로 치렀지만, 신원(伸冤)과 화해에 이르는 길은 멀다. 권상능 선생을 모시고 산에서 내려가면서 유족들에게도 더는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분단과 전쟁으로 말미암은 이 비극은 언제쯤 해원(解寃)의 날을 맞을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싣습니다.
#72년만의 추모제 #김천 보도연맹 사건 #독립운동가 임종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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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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