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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A' 이후 22년, 로또 한 장을 둘러싼 남과 북 청년들의 코미디

[하성태의 사이드뷰] 영화 <육사오>

22.08.26 15:26최종업데이트22.08.26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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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육사오> 스틸컷 ⓒ 싸이더스


"두 편의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다음에 만들어진 영화라서, 제작사와 배급사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갔을 것이란 오해가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명필름이란 회사가 그렇게 하는 회사가 아니고요. 아주 즐겁게 토론하며 작업했습니다. 특별히 대중적인 화법을 쓴 것도 아니었고요. (다음 행보를 위해) 완전히 결정적이었던 작품이고, 가장 흥행한 영화죠." (박찬욱 감독, 지난 6월 유튜브 채널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인터뷰 중)

<헤어질 결심> 개봉을 앞둔 인터뷰에서 박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를 이처럼 작품 세계에 결정인 변화를 준 변곡점으로 꼽았다. 개봉 당시 9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흥행기록을 갈아치운 <공동경비구역 JSA>는 지금 기준으론 가뿐히 '천만 영화'에 등극하고도 남았을 터다.

벌써 22년이다. <공동경비구역 JSA>에 오마주를 바치는 작품이 나올 법한 세월이 흘렀다. 진짜 나왔다. 젊은 시절 송강호가 군사 분계선 내에서 담배 연기와 함께 휘파람을 불던 명장면을 뻔뻔하고 영리하게 코미디로 승화시킨 작품이. 24일 개봉, <헌트>에 이어 박스오피스 2위를 달리고 있는 <육사오>(6/45)가 바로 그 작품이다.

<날아라 허동구> 이후 15년 만에 연출작을 선보인 박규태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의 코미디 버전"임을 숨기지 않는다. 'JSA'는 이병헌이 군사분계선 내 갈대밭을 정찰하다 밟은 지뢰가 남북 병사들을 만나게 해준 운명적인 계기였다. 그 공동경비구역(Joint Security Area) JSA가 공동급수구역(Joint Supply Area) JSA로 둔갑한다. 담배는 없지만 휘파람은 그대로다.

<육사오>는 코미디가 맞다. 얄궂은 바람이 군사분계선 위로 당첨금 57억짜리 로또 한 장을 날려 버린다. 무슨 수가 있어도 찾아야 한다. 소재부터 눈길을 확 잡아끄는 <육사오>는 <외계+인>을 제외하고 진지하고 각잡은 대작 위주의 여름 한국영화 개봉작 중 시원하게 웃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코미디다.

영리하고 날렵하다 
 

영화 <육사오> 스틸컷 ⓒ 싸이더스


제대까지 "97일하고 15시간 30분"을 남겨둔 말년 병장 천우(고경표 분)가 TV 앞에 앉는다. 우연찮게 주운 로또 당첨을 확인하는 것도 잠시, 그대로 놀라 뒤로 자빠질만 하다. 번호 45개 중 6개(6/45)가 맞아 버렸다. 실성한 듯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그러다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서 갑자기 눈물이 난다. 말년 병장이 이지경이니 '관심 사병'에 등극할 수밖에.

천우의 행복한 시간이 이어질 것 같던 남측 군사분계선 바로 앞 초소. 이등병에게 경계를 맡겨 놓은 천우가 "진짜 부자는 남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상류층의 마음가짐을 배우기 위해 자기계발서 탐독에 몰두하던 그때, 애지중지(?) 책 사이 끼워놨던 로또가 그만 바람결에 날아가 버린다. 그것도 군사분계선 북쪽 철창 위로.

이제 북쪽 병사가 등장할 차례다. 밤마다 미친놈처럼 몰래 군사분계선에 침입해 '로또 찾아 삼만리'에 나섰던 천우 앞에 "종이쪼가리에 주인이 어디있어? 먼저 주운 놈이 임자지"라며 당당해하는 북한 측 GP 상급병사 용호(이이경 분)가 나타난다. 로또 아니 북한말로 '육사오'의 존재조차 몰랐던 용호. 부하 병사 철진의 코치를 받은 용호는 57억을 꿀꺽하기 위해 로또의 주인을 찾아 나선다.

리얼한 듯 능청스럽다. 57억 로또 한 장을 차지하기 위한, 그 로또 당첨금을 회수하기 위한 남과 북 병사들의 실랑이가 능수능란하게 풀어낸다. 굳이 군 복무 경험이 없더라도 천우에게 감정을 이입할 만 하다. 그런 공감은 팔할이 '57억 로또 한 장이 북으로 넘어갔다'는 강력하고 영리한 설정에서 비롯된다.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다. 전개도, 인물 구성도 속도급이다. 해병대 제대 후 다시 입대, 전방 근무를 자처한 원칙주의자 강대위(음문석 분)도, 로또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남쪽 병사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던 북한 정치지도원 승일(이순원 분)까지도 57억 로또가 주는 자본주의의 마력에 순식간에 빠져든다. 그 돈으로 무얼 할 수 있을지를 제일 먼저 꿈꾸기 시작한다.

'JSA'도 그랬다. 위기는 동포애를 발휘할 기회요, 남과 북이 하나될 때 현실의 난관도 극복가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육사오>는 코미디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57억을 공동으로 회수하기로 마음 먹고 고심하는 남북 병사들 앞에 현실에선 결코 불가능할 것은 같은 미션을 제시할 것. 헌데 이게 꽤나 재밌다. 인물 간의 역할 바꾸기란 자고로 코미디 영화의 전통적인 소재 아니던가.

'JSA' 그 후 2022년 남과 북 청년들의 코미디
 

영화 <육사오> 스틸컷 ⓒ 싸이더스


예고편부터 재기발랄 그 자체였다. 일주일 전 유튜브에 올라온 요약 영상은 조회 수 200만을 훌쩍 넘겼다. 개봉일이던 24일 한 멀티플렉스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시종일관 킥킥대며 늦여름에 찾아온 이 코미디를 만끽 중이었다.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의 면면을 확인해 보니, 교복 입은 학생부터 10대와 20대가 주류다. 굳이 <공동경비구역 JSA>를 몰라도 상관없을, 아니 <헤어질 결심>은 봤어도 <공동경비구역 JSA>가 개봉했을 무렵 태어났거나 태어나지도 않았을 관객들이 <육사오>가 내놓은 타율 좋은 개그를 마주하며 시쳇말로 빵빵 터지고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쉬이 보지 못했던 풍경이다. <육사오>는 그걸 해낸다. 시트콤부터 코믹한 드라마를 다수 섭렵해온 고경표를 비롯해 박세완, 음문석 등 다소 황당하면서도 그럴싸한 소재를 받쳐주는 배우들의 연기가 우선 호감으로 다가온다. 남과 북 병사 6명의 개별 캐릭터 설정도 독창성을 추구하기보다 편안하고 조화롭다.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남과 북 청춘들의 이야기"라는 박규태 감독의 설명처럼 젊은 관객들이 좀 더 공감할 만한 소재, 이를 테면 취업이라든지 실생활 개그, 로맨스 등의 소재가 대화와 설정 안에 자연스레 묻어나는 것도 장점이다.

박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오랫동안 묵혔던 소재를 4년 전 끄집어올렸다고 밝혔다. 당시만 해도 이전 정부들어 남북 정상회담 등 남북 평화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시기다. <육사오> 속 젊은 병사들이 속내를 드러내고 형동생을 자처하며 어울리는 장면들은 현실의 경색된 남북관계를 떠올리면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22년 전 'JSA'를 마주한 관객들도 딱 그랬다.

57억 로또 앞에 이념 따위는 간단히 뛰어넘어버리는 코미디 <육사오>는 그럼에도 한민족의 동질감과 동포애가 기반하지 않는다면 전개될 수 없는 영화이기도 하다. 후반부, 감독이 반전으로 마련한 맷돼지 등장 신에서 또 다른 남북한 병사들의 갈등과 화해를 다뤘던 <웰컴 투 동막골>(2005)의 자장이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한편으로 'JSA' 이후를 상상하게 되는 <육사오>가 "남과 북 청춘들의 이야기"란 설명도 그럴싸하다. 용호의 동생이자 대남 선전 마이크를 잡고 천우와 '디스'를 벌이던 북한 군단선전대 병사 연희(박세완 분)의 존재는 기능적인 듯하면서도 꽤나 효과적이다.

특히 천우와의 로맨스와 박세완의 반짝거리는 연기는 'JSA' 속 이영애 캐릭터의 대칭은 아니더라도 그에 버금가는 존재감을 과시한다. 또 1020 관객들을 의식한 듯한 말장난 개그는 소구성이 강하다. 로또 당첨금을 찾기 위해 농협 본사를 찾아가는 남한 관측병 만철(곽동석 분)의 활약(?)을 소셜 미디어 소동극에 담아낸 아이디어도 확실히 효과적이다.

"통일이 뭐 별거가.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으면 통일이지"라는 후반부 용호의 대사처럼, 2022년에 도착한 이 귀엽고 날렵한 소동극은 남북 관계를, 민족의 동질감을 긍정하고자 하는 기운으로 넘쳐난다. 'JSA' 이후 22년, 세대를 건너 뛴 관객들이 <육사오>를 보며 킥킥대는 장면 자체가 상징적인 영화 밖 풍경일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또 하나 영화 밖 이야기. <육사오>의 순제작비는 50억 규모로 알려졌다. 앞서 4주 연속 개봉한 여름 텐트폴 영화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허허실실 힘을 빼고 제 역할에 충실한 <육사오>의 존재는 무척이나 소중해 보인다. 대형 영화들만 극장에서 살아남을 거란 우울한 전망이 고개를 드는 시점에 등장한 코미디라 더더욱.

개인적으론, <육사오>가 완성도 높은 가족코미디라 평가 받았던 바로 그 <날아라 허동구> 박규태 감독의 연출작이란 사실이 반가움을 안겨준다. <날아라 허동구> 역시 감독의 긍정적인 시선을 바탕으로 당시 한국영화에서 흔치 않던 리듬감과 장르적 완결성을 자랑했던 영화다. 그때 그 감독이 15년 만에 귀환해 남과 북 청춘들의 이야기로 청춘 배우, 젊은 관객들과 소통을 이뤄가는 모습 자체도 사뭇 감동적이지 아니한가. 
 

영화 <육사오> 스틸컷 ⓒ 싸이더스

육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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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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