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읍성 남문 왜구의 출몰, 전란의 중요성 등으로 외딴 섬에 세워진 꽤 큰 규모의 읍성. 둘레가 800미터에 이르렀다.
이상구
얼핏 이곳 대룡리가 섬의 중심처럼 보이지만 그건 아니다. 애초 이 섬에서 가장 큰 마을은 대룡리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읍내리였다. 아직 그곳에 남은 읍성과 향교가 그 역사를 웅변한다. 교동읍성은 둘레가 800m 가까이 되는 제법 큰 규모였다. 모두 3개의 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남문만 남아 있다. 조선 인조 때 처음 쌓았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곳을 둘러보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외지고 한적한 섬마을에 이렇게 크고 견고한 성이 왜 필요했을까. 이 역시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알 수 있다. 수도 개경과 지척이라 연안이든 국제항로든 교동을 지나야 개경에 닿았다. 그런 지리적 이점으로 교동은 교역과 교통의 요충지로 자리매김했다. 조금 과장하자면 오늘날의 경제자유구역 정도?
사람과 물자가 모여드니 왜구도 극성을 부렸다. 이들은 마을 안까지 쳐들어오기도 했다. 대책이 필요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교동의 군사적 중요성도 크게 부각되었다. 인조임금은 마침내 이곳을 삼도수군통어영으로 승격시키고 성을 쌓아 올린 거였다. 지금의 고즈넉한 마을 풍경만 보면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읍성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교동향교가 있다. 국내 최초로 알려져 있다. 1127년 고려 인종 때 지어졌다고 한다. 이 향교엔 또 하나의 '최초' 기록이 있는데, 공자와 주자 상이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봉안된 곳이 이곳 교동향교다. 이곳을 향교의 으뜸인 수향(首鄕)이라 부르는 이유다. 공자 상은 충렬왕 땐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에서 들여왔다.
조상을 모시고 후학을 교육시키던 교동향교의 전통은 현대사회에 들어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후손들은 때에 맞풔 석전대제, 분양례 등을 행하는가 하면, 5월부터 11월까지는 아이들을 모아 서예와 예절교육 등을 시키고 있다.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조상들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는 살아 있는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분단의 현실

▲교동 철책선 길 교동은 섬이지만 바다가 없다. 바다가는 길은 높고 견고한 철책선이 가로 막았다.
이상구
교동도는 섬이 분명하지만 해수욕장이 없다. 아니 바다에 다가가기조차 어렵다. 모래사장이 없는 지형적 이유도 있지만 해안선의 거의 전부를 높고 견고한 철책선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알뜰한 섬사람들은 철책선에 바로 아래까지 농사를 짓는다. 한 치의 땅도 허투루 두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인다. 그 철책선 너머로는 북녘 연백 땅이 평화로이 보인다.
섬은 섬답지 않게 농업이 발달했다. 자금 교동평야에서는 가을 벼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다. 여기 땅은 한 해 농사로 3년 먹고 산달만큼 풍요롭다. 이 논의 물은 커다란 저수지 두 곳이 댄다. 난정과 고구저수지다. 규모가 보통이 아니다. 이 저수지들이 유명한 건 꽃 때문이기도 하다. 난정 저수지엔 해바라기가, 고구저수지엔 연꽃이 핀다. 교동은 가히 꽃의 섬이다.
고구저수지는 연꽃은 6월경 만개한다. 물 위로 데크를 설치해 호수 한가운데까지 들어가 꽃 구경을 할 수 있다. 난정 저수지는 해바라기 천국이다. 주민들이 힘을 합쳐 저수지 주변에 커다란 해바라기밭을 일구었다. 9월 초부터 만발하는 해바라기는 장관이다. 지금이 그 축제기간이다. 그게 지면 주민들은 그 자리에 청보리를 심는다. 다음 해 봄 푸른 보리밭 풍경도 훌륭하다.

▲난정리 해바라기 정원 주민들이 스스로 힘을 합쳐 꾸몄다. 지금(9월) 모든 해바라기가 만개했다. 축제가 열리고 있다.
이상구
고구 저수지를 둘러치고 있는 화개산의 9부 능선에는 특별한 구조물이 지어지고 있다. 화개산 스카이 워크로 명명된 전망대다. 북녘땅을 훤히 볼 수 있는 곳이다. 모노레일을 놓고 정원도 예쁘게 꾸며 내년에 개장할 예장이라고 한다. 완공되면 누구보다 실향민들이 반길 것 같다. 고향 땅을 바라보며 망향제라도 올리지 않을까 싶다.

▲화개산 전망대 내년 준공을 목표로 공사가 한창이다. 모노레일로 올라갈 수 있다. 실향민의 성지로 자리매김할 듯.
이상구
교동도를 방문하려면 특별한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 소총까지 맨 해병대원의 삼엄한 검문을 지나야 한다. 입도신청서를 쓰고, 신분증을 보여주고 출입허가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이 또한 분단의 현실이 만든 살풍경이지만 기분까지 나빠지지는 않는다. 그 팽팽한 긴장감은 은근 즐길 만하다. 짐짓 군기 바짝 든 표정이지만 아직 앳돼 보이는 해병대원들의 모습도 흐뭇하다.
물론 저 한창 나이를 제복에 저당 잡힌 젊은이들의 모습은 안쓰럽기도 하다. 이래저래 교동은 한과 그리움의 섬이다. 북쪽을 향한 높은 전망대를 올려다보며, 해변의 철조망 길을 걸으며, 그 너머로 고향 땅을 간절하게 바라보는 실향민들의 모습을 보며, 해병대원들의 검문을 지나며 드는 생각은 하나다. 이 분단의 고통은 우리 대에서 끝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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