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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15년 동안 운영하던 약국을 그만둡니다

'이제 1등 백수로 행복하라'는 아들 내외의 인사에 가슴이 뭉클

등록 2022.09.10 17:44수정 2023.04.1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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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2023년 4월 13일 오전 10시 43분


지난 8월 말을 끝으로 아내가 15년 운영하던 약국을 그만뒀다. 60을 목전에 둔 나이에 계속 하기엔 정신적, 육체적으로도 피곤했던 것 같다. 후임자에게 약국을 넘기기 하루 전인 8월 31일, 약국 근무를 마치고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재고 약품을 정리했다. 알약을 하나하나 세며 확인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그가 그동안 약국에 쏟은 시간들을 떠올렸다.

아쉬움 없지 않으나... 아내의 은퇴를 찬성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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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약들을 일일이 세어 재고정리하느라 마지막날까지 자정을 넘겼다. ⓒ 정진영

 
나이 40 중반에 처음으로 약국을 시작한 아내는 지금까지 제대로 된 여름휴가 한 번 가지 못할 정도로 일에 매진했다. 약국 인근의 의원 여름휴가 일정이 다 달라 도저히 며칠씩 약국을 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가 둘만의 해외여행을 처음 간 것도 몇 년 전 설과 추석을 이용해 2박 3일 내지 3박 4일 홍콩, 태국을 다녀온 게 전부다.

아내가 약국을 그만둔다고 할 때 무조건 찬성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걸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의사의 갑질, 진상 고객의 행패에 이어 임대차 재계약 때마다 확인되는 건물주의 횡포 등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안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수입은 받는 스트레스만큼의 대가'라고도 하지만 그 정도가 심했다. 남들 앞에 자기 생각을 잘 얘기 못하고, 천성이 워낙 여리고 착해 대다수는 견딜 수 있는 것도 아내는 상처로 받아들였다. 하여튼 약국을 그만두기 한두 달 전부터는 잠을 잘 못 잘 정도로 힘들어했다.

회사에서 정년퇴직한 60을 넘긴 내 나이 또래의 지인들은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연금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적지 않은 수입이 있는 배우자가 있는 것이 어디냐며 '대박'이라고 추켜세웠다. 아내가 약국을 정리한다는 소식에 나보다 더 아쉬워 한 친구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야, 니가 조금 잘 하지. 왜 그걸 그만두게 하냐", "우리 나이에 벌 수 있다는 게 어디냐, 다시 한 번 생각하시라 해라" 등 만류 일색이었다.


아내 결정에 전적으로 동의한 나도 한편으론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필 정리하려는 시점부터 약국이 엄청나게 잘 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속된 표현으로 하자면 눈 앞에 돈이 어른어른거렸다고 할까. 그러나 이런 감정은 곧 사그라들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이 최고라는 대원칙이 소소한 이득을 압도했다.

내 글이 어쩌면 내 연배의 독자들에게는 '재수없는 소리'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당장 한두 푼이 아쉬운 형편인데 배부른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뭐야 마누라 돈 잘 벌었다고 자랑하는 거냐"라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15년 동안 빨간 날을 제외하고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가족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아내에게 위로와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것을 결코 주저할 수 없다.

'1등 백수' 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

우선 아내의 공허함을 메꾸는데 어떻게 도와야 할지 고민 중이다. 십 수년 동안 매일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점심시간도 없이 공들여 키웠던 일터를 접는다는 게 쉬운 일이겠는가. 그동안 기여했던 시간과 노력, 정성을 반납하는 데서 오는 상실감을 위로하는 데 우선 노력할 작정이다.

결혼생활 35년 만에 처음으로 부부가 백수로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만큼 산책도 자주하고, 맛집도 좀 다니고 여건되는 대로 여행도 해 볼 작정이다. 조만간 동생부부가 사는 아프리카를 다녀올까 한다.

며칠 전 큰아들 내외가 아내의 퇴직(?) 저녁 자리를 마련했다. '위대한 어머니 상'이라는 기념패에는 '새로이 다가올 어머니의 제2의 인생을 응원합니다'라고 새겼다.

동봉한 작은 기념카드에는 '1등 엄마, 1등 약사, 1등 아내 OOO 여사 이제 1등 백수로 행복하세요'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아내는 1등 백수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그 자격이 훼손되지 않도록 나 역시 1등 백수가 돼 내조와 외조에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할 생각이다.

"여보, 애썼습니다."
#약국 #1등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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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간의 직장생활을 끝내고 2021년 9월 말 60세 정년퇴직을 합니다. 평소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글을 가까이하며 새 인생을 맞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변의 소소한 글감을 소재로 울림이 있는 글을 많이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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