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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정직했던 한 빨치산의 해방 여정

삶에서 해방하는 아버지를 담은 정지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등록 2022.09.30 11:19수정 2022.09.30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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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참 생각이 많이 가는 소설이다. 읽을 때는 너무 많은 이들이 생각났다. 당연히 내 부모님이 생각났다. 주인공인 아버지 고상욱에 비해 내 아버지는 10살 정도의 어리고, 전남의 서부에서 살았지만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의 여정을 겪었다.

장기수로 살았던 대학 동기 이식열의 외할버지인 노촌 이구영 선생도 많이 생각났다. 대학시절부터 익선동 노촌 선생의 집을 다녔고, 발인까지 동행했는데, 그 삶의 곡절을 나도 얼핏 느낄 수 있었다. 친하게 지내는 신정훈 의원도 생각났다. 몸으로 시대를 부딪혀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빨치산 부부 밑에서 자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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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2008넌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야기를 묶어낸 자전 소설 ⓒ 창비


소설의 주인공 고상욱은 2008년 5월 1일 작고한 작가 정지아의 아버지 정운창이다. 그는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조직부부장을 지냈고, 어머니 이옥남 여사도 남부군 정치지도원이었다. 정운창 선생은 여순사건이 일어난 1948년 백운산으로 입산했다. 막 스물이 넘긴 나이였는데, 그는 백운산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어머니는 지리산에서 활동하다가 내려와 부부가 됐다.

물론 입산 전에 각기 결혼을 했지만, 산이 다른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4년을 산에서 살아낸 아버지는 1952년 위장 자수를 하면서 산을 내려온다. 그리고 소설에 있듯 위장 자수가 들통나 다시 감옥생활을 하다가 1980년에 다시 풀려난다. 빨치산의 딸, 아니 빨치산 부부의 딸로 살았던 작가는 문학을 전공하고 부모의 삶을 풀어서 1990년 <빨치산의 딸>을 출간하기도 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너무 익숙한 전라도 사투리가 반가웠다. 아마도 다른 지역 사람들은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텐데, 나는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1965년 생인 작가는 우리 셋째누나랑 동갑이고, 나랑은 4년 터울인데, 전라도 사투리를 최대한 말소리에 가깝게 썼다.

"헥명가라는 사램이 술 한나 담배 한나 지맘대로 못허다니 말이나 되냐? 니 애비, 인생 헛살았는갑다. 나가 니 애비 땜시 암만혀도 내 명에 못 죽겄다."

전라도 사투리의 소설 사용은 딱히 정리된 것은 없다. 충청도는 이문구 작가가 표준처럼 되어 있지만 전라도 사투리는 조정래도 최명희도 표준이라 할 수 없다. 외히려 김대중 대통령의 말이 표준에 가까울텐데, 역시 전라도 서남쪽의 전형일 뿐이다. 정지아 작가는 구례 지역의 사투리를 주로 집중했을 것이다.


사투리를 글로 구성했을 때 가장 큰 매력은 말의 정감을 살리기도 하고, 삶의 곡절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 자체로 스토리를 갖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가장 강한 말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가끔 던지는 이 말이다.

"자네 혼차 잘 묵고 잘살자고 지리산서 그 고생을 했는가? 자네는 대체 멋을 위해서 목심을 건 것이여!"

아버지 삶으로부터의 해방

전라도를 배경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가 그러듯이 3일간의 스토리는 죽은 자와 산 자 간의 화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실 아버지는 진짜 사회주의자의 삶을 살았다. 빨치산으로 살 때 숨은 순경을 만나도 살려줬고, 우익인 친구나, 다문화 소녀든 누구에게도 인간적으로 대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역사가 그랬듯 아버지의 빨치산 경력으로 인해 연좌제가 적용되어 육사에 떨어진 큰집 길수 오빠나 제대로 왕래하지 않는 작은 아버지 등은 적지 않은 인연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왔다.

사흘간의 장례기간은 그들이 어떻게든 화해하고, 죽은 자가 묵은 이승의 인연들을 정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역사의 무게가 다른 곳은 많지 않다. 지리산을 낀 구례는 근대에 가장 고난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민간인 대비 가장 희생자가 많은 지역은 내 고향 영광이었다. 결국 이데올로기로 인해 좌우가 가장 치열하게 죽음의 굿판을 벌인 곳이라는 뜻도 된다. 한국전쟁 당시 10대 초반이었던 아버지는 덜했지만, 외할아버지가 면장을 지내서 많은 희생자를 낸 어머니 집안은 그 풍파가 만만치 않았고, 열 살의 어머니도 그 속에서 몇 번의 영웅담을 만들어냈다.

소설은 결국 아버지의 해방일지다. 빨치산으로 죽은 아버지에게 해방은 결국 이데올로기가 아닌 인생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여정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치매를 앓기 시작했고, 그것이 알려질 무렵에 동네 전봇대에 부딪혀 돌아가신 아버지의 삶으로부터의 해방은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힘을 준다.

밖에서 묻어온 먼지 하나 쉽게 털어내지 못하고, 농사일도 그냥 그냥인 아버지는 결국 선한 삶을 살았다. 노란머리 다문화 소녀를 위로해주고, 딸과 맞담배를 해줄 수 있는 아버지는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랑 인연이 될 남자가 자신으로 인해 출세 길에 지장이 될 것 같다고 딸에게 남자를 포기하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선택들은 세상이 좀 더 평화롭게 하는데, 낫다는 빨치산의 길이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은이),
창비, 2022


#정지아 #해방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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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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