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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했다"... 제주4.3이 학생 창작뮤지컬로 탄생하기까지

교사는 곡을 쓰고 학생은 안무를 만들고, 함께 만들어가는 뮤지컬

등록 2022.10.18 11:18수정 2022.10.18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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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이라는 표현 하에 경쟁과 입시몰입교육을 지양하고, 자치와 상생을 위한 교육을 하며, 학생들이 현재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곳에서 여러 존재들과 좌충우돌하며 교육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전하고자 합니다.[기자말]
오는 12월 29일 창작뮤지컬 <43의 언덕 너머에는>이 학교 강당에서 초연된다. 정확히는 초연이자 종방연이다. 고등학교 학생들이 2학년에 편성된 뮤지컬 과목의 결과물을 발표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욕심이 있다면 그 자리에 학부모는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까지 초대하여 4.3사건(아래 4.3)의 아픈 과거를 알리고, 이 무거운 주제를 내면으로 소화해 예술작품으로 승화해 낸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제주 이야기를 수업 내용으로 선택하기까지

원래 2022학년도의 뮤지컬은 '춘향전'을 배경으로 해 만들기로 했었다. 한국사와 가정 수업까지 융합해 역사공부를 비롯해 그 시대의 복식 및 생활양식까지 배우고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런데 2021학년도 하반기에 '회복적 생활지도를 위한 연수'가 시작되면서 조금씩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는 미래교육을 지향하는 공립 대안 고등학교로서 다양한 교육과정은 물론이고, 생활지도의 방식에서도 차별성을 갖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작은 학교를 표방하여 전교생 135명, 학급당 정원을 15명으로 설정해 학생 개인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을 수 있도록 했다.

전통적 방식의 생활지도에서도 가장 선행되는 것이 상담이긴 하겠지만, 학교 현장에서의 현실적 한계는 학생의 잘못이 즉시 징계로 연결되는 응보적 대처가 대부분인 상황이다. 잘못을 했으면 응당 처벌을 받아야 하고 그것이 곧 피해 측에게도 적절한 보상이 될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하지만 회복적 정의는 피해의 복구에 더욱 초점을 두며 공동체의 지속적인 회복에 집중한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물론이고 가해자의 목소리에게도 귀를 기울여 사안의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고 모두의 마음을 어루만져 더욱 건강한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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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적 정의 연수 기간 동안 교과서가 되었던 책의 내용 ⓒ 안사을

 
우리 학교는 끊임없이 회복적 관점에서 학생의 생활지도를 할 수 있도록 서로를 독려해왔고, 교사들은 자신의 감정을 바닥까지 소모해가면서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고군분투해왔다. 그러한 과정에서 지친 사람들도 있었고 서로의 관점이 달라 화합하지 못한 사례도 있었다.

일관된 방향성과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속속 등장했다. 이제 개인의 신념에 의한 노력만으로는 오히려 서로를 지치게 만드는 상황이 다가온 것이다. 그러던 와중 '한국회복적정의협회'에서 3급 지도자 자격증 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마침 일정이 학교의 방학과 딱 맞아서 십여 명의 교사들이 뜻을 모아 해당 과정을 이수하게 됐다.


일주일은 원격연수였고 나머지 일주일은 제주에서의 집합연수였다. 평화로운 삶이 처절하게 짓밟혔던 곳, 그래서 더욱 화합의 장이 되어야 하는 곳이 제주이니 여러  모로 적절한 연수 장소였다. 특별히 이번에는 4.3의 유족이자 역사 전문가이신 선생님도 함께해 4.3 관련 강의와 현장답사도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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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답사 섯알오름 근처의 학살터. 예비검속으로 인해 수많은 죄 없는 주민들이 학살을 당한 곳.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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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적 서클 서클에서 나눈 내용. '나는 언제 고마움을 느끼는가'에 대해 각 주체별로 정리한 것. ⓒ 안사을

 
제주에서 울고 웃으며 일주일을 보냈다. 서로의 바닥을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더욱 함께 있음이 소중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 마음 깊은 곳에서 제주 4.3을 뮤지컬로 제작하고, 다양한 수업을 통해 융합한 후 연말 발표까지 하고 싶다는 생각이 일었다. 곧바로 그 의지를 한국사 교사를 비롯하여 몇몇 선생님들께 공유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한국사 시간에는 4.3을 역사적으로 다뤘고, 1년짜리 수업인 통합기행(통상적인 수학여행과 다르다)을 제주도로 가기로 했다. 가정 시간에는 한지공예를 통해 1940, 1950년대의 의상을 만들어보기로 했고, 일러스트 방과후 수업에서는 무대의 배경을 팝아트로 만들기로 했다.

패기롭게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나 가장 먼저 부딪혔던 벽은 4.3의 참혹함이었다. 영화나 뮤지컬로 제작된 작품을 학생들이 관람하는 것은 가능하겠으나 직접 출연하는 것은 너무 큰 부담이 될 것 같았다. 과거 인물을 대신해 연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이 상처를 받을 것이라 예상했다. 이 어려움을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표현했다.

"4.3사건, 4.3항쟁에 대한 뮤지컬은 17세 이상 관람가일 수는 있지만 17세 이상 출연가는 되지 못할 것 같았어요. 여러분에게 이 참혹한 광경과 처참한 역사를 연기시킬 것이 걱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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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활동 가사 창작을 위해 한국사 수업 때 받았던 인상을 짦막하게 정리해보도록 했다. ⓒ 안사을


이에 대한 걱정은 두 가지의 이유로 해결됐다. 첫 번째는, 1947년부터 약 7년간 제주는 피바다였고 엄청난 광풍이 불었지만 그 안에서도 사람들의 삶이 있었을 것이라는 4.3 유족 선생님의 강의 내용이 마음에 담겼기 때문이었다. 그분의 강의가 있었던 날 나는 숙소로 돌아와 1시간이 넘도록 통곡을 했었다. 그러면서 더욱 창작의 의지를 굳히기도 했다.

연수가 끝난 뒤에도 약 3주 동안 제주에 머물면서 천천히 바다와 산의 숨결을 느꼈다. 그러면서 차츰 극의 내용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에 대해 실마리가 풀렸다. 역사적 배경을 4.3으로 두고 그 안에서 그들이 살아갔던 모습을 최대한 담백하게 그려보면 아이들이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번째는 역할의 배정이었다. 등장인물 중 악역이 없도록 설정하면 그나마 아이들의 내면이 무의식적으로 상처받는 것은 면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신 해당 내용을 3인칭 시점으로 만들기로 했다. 노래 중에 서사로 등장하거나 내래이션의 상황 설명 등으로 대신하기로 한 것이다.

가장 먼저 '오프닝넘버' 악곡 창작에 착수했다. 뮤지컬의 전형적인 형식에 의하면 오프닝넘버는 가장 커다란 무대가 된다. 극 전체의 서사를 보여주기도 하고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참여해 합창을 하기도 한다. 오프닝넘버가 구성이 되면 사실 뮤지컬 전체의 절반을 완성한 것이나 다름없다.

오프닝넘버인 <사건, 사람, 소망>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 부분은 4.3의 서사가 담겨있다. 두 번째 부분은 참혹한 상황을 그리는, 가사 없는 표제적 음악으로 시작하며 이어서 시민들이 당했던 고난에 대해 노래하는 부분이 나온다. 세 번째 부분은 자유와 평화를 원하는 제주 시민들의 염원을 표현했다. 

작곡의 시작은 3월에 했으나 불과 1주일 전인 10월 12일에 전체 반주가 완성됐다. 이제 40여 명의 목소리를 녹음해야 한다. 녹음은 학교 방송실에서 싸구려 장비로 소박하게 진행된다. 아이들은 이 과정을 가장 재미있어한다. 마치 가수가 된 것처럼 한껏 분위기를 잡아보기도 하고, "에이, 에스, 엠, 알"을 마이크 앞에서 속삭이며 키득거리기도 한다.

악보를 잘 보지 못하고 음을 쉬이 익히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완성된 반주 위에 나와 한 학생의 목소리를 넣어 가이드판 녹음본을 만들어 배포했다. 아래는 그 영상이다. 악보와 가사가 함께 나온다. 아마추어 선생이 아마추어 학생과 함께 작업하는 보잘것없는 소품이니 부디 음악적 평가보다는 역사 알기와 평화 찾기에 대한 염원을 발견해 주시기를 바란다.
 

앞으로 몇 편의 기사를 더해 약 10곡 정도의 창작곡을 소개하는 형식을 빌려 4.3 당시 어떤 일이 있었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대하고자 하는지에 대해 나누고자 한다. 동시에 아직도 미완성인 5개의 곡을 기한 안에 완성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오늘(10월 17일)부터 우리는 제주도에 4박 5일을 머물면서 통합기행을 한다. 야영을 하고, 한라산을 걸으며, 4.3의 발자취를 밟을 것이다. 나는 아직 시작하지 못한 마지막 합창곡을 쓰기 위해 빈 오선지 몇 장을 챙겨왔다. 제주의 수많은 신들과 자연의 숨결이 부디 훌륭한 영감을 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대안교육 #43 #창작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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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인 '고산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필름카메라를 주력기로 사용하며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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