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이유 태피스트리 일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바이유 주교가 윌리엄 군을 따라 서 있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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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았지만 기억해야 할 여성들의 실잣기
훗날 역사화(畫)에서 여성 화가를 배제한 사실을 고려하면
무훈시(武勲詩, 봉건 제후나 기사의 무용담을 노래한 중세 프랑스 서사시를 이르는 말) 형식으로 역사적 사실을 표현한 바이유 태피스트리의 의미는 더욱 크다. 이 태피스트리의 작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수녀를 비롯한 '다수의 여성들'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미술사학자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에서 중세미술의 하나로서 바이유 태피스트리를 언급하지만 누가 만들었는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반면 휘트니 채드윅은 <여성, 미술, 사회>에서 태피스트리의 내용 외에 누가 만들었는지도 짚어본다.
중세에 자수는 전적으로 여성이 담당했다. 태피스트리의 후원자 역시 여성이 많았다. 바이유 태피스트리는 마틸드 여왕의 태피스트리로도 불리는데, 그는 윌리엄의 왕비였다. 그가 직접 이 거대한 작품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작품을 주문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제프리 초서의 소설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배스의 부인이 "여성의 무기는 실잣기"라고 말하듯, 중세에 실 잣는 노동은 여성의 주요 경제활동이었다. 당시에는 길드 작업장에서 남녀가 함께 작업하기도 했으나 자수 분야는 거의 전적으로 여성이 맡았다. 여성들은 실잣기 노동을 통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여성의 가내 생산이 남성의 경영체제로 변모하면서 13세기 이후 여성들의 전문적인 자수 활동은 끊긴다.
중세에는 예술을 개인의 창작으로 여긴다거나 천재성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익명의 집단으로 작업하는 방식이 보편적이었다. 예술과 노동, 혹은 예술과 기술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았다. 오늘날 창작의 개념으로 중세의 작품을 해석하면 곤란하다. 대체로 '작가'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그 작가의 이름은 남기지 않았다.
게다가 중세의 많은 예술 작품은 '만든 사람'이 아니라, 주문한 사람이나 조직위원장인 성직자 등의 이름으로 남았다. 제작자의 이름을 적을지 여부도 수도사들이 정했는데 같은 교단 수도사들 이름을 중심으로 기록했다. 다시 말해 권력이 있는 교단의 남성 수도사일수록 이름을 남기기 쉬운 구조였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바이유 태피스트리는 오늘날 의미 있는 문화유산이지만, 자수에 참여한 많은 여성들의 이름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익명의 여성들'이 그들의 손으로 한 땀 한 땀 지어간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익명의 여성들이
그들의 손으로 한 땀 한 땀
지어간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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