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권력이 폭력이 아닌 보호로 작동되길 꿈꾸며

김훈 <저만치 혼자서>를 읽고

등록 2022.10.29 17:57수정 2022.10.29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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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저만치 혼자서> 김훈의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 책 표지 ⓒ 임명옥

 
작가 김훈은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  <하얼빈>과 같이 역사 속 실존 인물과 역사적 사건을  구체화시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능력이 탁월하다. 또한 1948년 생인 작가가 살아온 지난 세기의 현대를 되살려 분석하고 연구해 짧은 이야기로 만들어 보여주는 실력도 탁월했다. 

올 6월에 나온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에는 각각 독립된 일곱 편의 단편소설이 모여 있다. 노량진에 모여 든 구준생(9급 공무원 준비생)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자'를 비롯해 호스피스 수녀원 이야기를 그린 '저만치 혼자서', 나이 들어 가는 노년의 삶을 그린 '대장 내시경 검사'와 '저녁 내기 장기' 등 각각의 작품은 작가 특유의 개성있는 문체와 깊은 관찰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 내 마음에 가장 와닿았던 이야기는 '명태와 고래'였다. 주인공 이춘개는 강원도 동해안에 사는 평범한 어부다. 금강산 근처 포구인 어래진에 살다가 1950년 전쟁이 일어나 아내와 아이 둘을 데리고 배로 반나절 거리인 향일포로 월남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배를 가지고 이춘개는 어래진에서 그랬듯이 향일포에서도 바다에 나가 명태를 잡아 생계를 유지한다. 

어느 날 밤 명태를 잡고 돌아오는 길에 이춘개의 배는 조류에 밀려 방향을 잃었다. 포구가 보이고 잘못 들어섰다 느낀 순간 북쪽 경비정이 총을 쏘며 다가왔다. 북에서 이춘개는 6개월 동안 억류당했는데 배는 압수당하고 몸만 풀려났다. 남쪽으로 넘겨진 그는 경찰과 정보기관에 다시 심문당하고 풀려나는데 배가 없어진 그의 가족에게 가난은 일상이 된다.

송환된 지 6년 만에 그는 다시 체포돼 간첩죄와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가 씌워져 징역 14년 형을 선고받는다. 13년의 세월을 복역하고 석방된 그에게 가족은 이미 소식 끊긴 지 오래고 향일포 사람들은 각박했다. 징역살이를 벗어난 이춘개는 여인숙에 기거하면서 교도소에서 배운 서예를 기초로 그림을 그렸다. 화선지에 바다와 마을을 그려 향일포의 수협 회관 복도에 전시를 했다. 전시가 끝나는 날 이춘개는 바다에서 사체로 발견된다.

작가는 이춘개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데 나는 그가 이념과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에 희생됐다고 해석한다. 이춘개는 명태를 잡으며 생계를 이어나간 평범한 어부다. 전쟁의 공포가 그를 떠밀어 고향을 떠나게 했고 분단이라는 군사분계선이 그를 억류하고 그의 배를 빼앗았다. 억울한 긴 세월의 감옥살이 끝에 밖으로 나온 그에게 향일포에서의 삶은 또다른 징역살이로 비쳐졌다. 가족도 이웃도 친구도 없는 그는 집도 없고 밥도 없어 가까운 바다에 풍덩 몸을 던졌을 것이다. 

이념과 국가권력이 저지른 폭력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이춘개의 삶 전반에 나타난 일상적이고 제도적인 폭력이었다. 밥벌이 수단으로 명태를 잡기 위해 바다로 나간 이춘개에게 합법적으로 남과 북이 저지른 폭력은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부서뜨리고 무너뜨렸다.


작가 김훈은 광복 이후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학살과 고문, 인권침해 사례들이 담긴 보고서를 읽고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이 소설을 썼다고 밝힌다.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에서 작가는 이 땅에 태어나 이 땅에서 밥벌이하며 살아간 죄밖에 없는 수많은 이춘개들을 만났을 것이다.

작가는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생성된 마을을 그리고 섬과 바다를 묘사하며 그중에 한 명의 이춘개를 불러내었다. 그가 만들어낸 인물 이춘개는 관찰자 입장을 견지하면서 그려졌지만 소설을 읽고 나면 이춘개가 절망하고 억울해하고 포기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분단된 시대에 태어난 나의 세대와 그 이후 세대에게 분단국가는 일상이 됐다. 일상은 평범해서 아무런 문제의식없이 받아들여지는데 작가가 그려낸 '명태와 고래'를 통해서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분단 시대가 얼마나 야만적인지 고통스럽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작가는 '명태와 고래'에서 고통과 절망을 말하기는 쉽고 희망을 설정하는 일은 늘 어렵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춘개는 바다에 들어가 이 땅을 떠났을 것이다.

나는 국가권력이 폭력으로 작동돼 수많은 이춘개들을 짓밟지 않고, 폭력으로부터 수많은 이춘개들을 보호할 수 있는 나라를 꿈꾼다. 그리고 분단이 극복될 수 있는 삶의 자세와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본다. 고통을 견디고 절망을 넘어서 저 머나먼 곳에 있는 희망이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기자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저만치 혼자서

김훈 (지은이),
문학동네, 2022


#김훈 #소설 #문학 #단편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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