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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편지 쓰는 사람들... 딸 잃은 남자가 얻은 깨달음

[하성태의 사이드뷰] 가톨릭영화제 개막작 <신에게 보내는 편지>

22.10.28 17:24최종업데이트22.10.29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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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이 넘도록 리뷰와 칼럼을 쓰고 있어도 어렵습니다. 문학소년, 영화청년으로 성장했어도, 이제는 몇 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엎어지기를 반복해도 쉽지 않습니다. 이제는 늘 이야기를 고민하고 콘텐츠에 서사가 없으면 허전할 지경입니다. 어쩌면 세상 또한 개개인의 서사와 이야기로 구성될런지도요. 영화와 드라마를 그 서사와 이야기를 중심으로 탐구해 보겠습니다.[[편집자말]

영화 <신에게 보내는 편지>의 한 장면. ⓒ 제9회가톨릭영화제

   
'왜 사람은 행복해지기 전에 고통스러워야만 하나요.'

전 세계인이 신에게 보낸 편지 중 한국어가 유독 귀에 꽂힌다. "아스날이 우승하게 해주세요"라거나 "브래드 피트와 사귀게 해주세요"라는 바람은 애교다. 신을 향해 욕설을 날리거나 냉소를 전하는 편지가 왜 없겠는가. 

왜 그럴 때 있지 않는가. 기쁠 때보다 절망과 우울 속에 빠졌을 때 신을 찾고 원망하게 되는 기분 말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 속 경구가 지극한 위선이라 느껴질 때, 우리는 타인을 원망하는 것을 넘어 그 증오와 분노의 화살을 종국엔 신에게까지 향하곤 하지 않았던가.

제9회 가톨릭영화제(CaFF) 개막작 <신에게 보내는 편지> 속 예루살렘 우체국에 취직하려는 중년 남자 모세도 그런 범인이었다. 20년 넘게 우체국에서 일했다는 이 남자는 지금 4년 동안 쉬었다 겨우 일을 다시 시작하려는 조마조마한 상태다. 범상치 않은, 아니 예루살렘이라서 가능할지 모를 이 신의 우체국에서 이 허무에 빠진 남자가 마주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삶이 허무할 때 신에게 쓰는 편지       
 

영화 <신에게 보내는 편지> 중 한 장면. ⓒ 가톨릭영화제

 
아마도 오래 칩거했던 것 같다. 사랑하는 딸을 잃은 자의 고통을 어느 누가 바닥까지 헤아릴 수 있을까. 아내의 방문도 외면하며 홀로 지내던 남자 모세가 정신을 차리고 도착한 곳이 바로 이 우체국인데, 아니나다를까 이 판타지와 같은 공간이 자리한 곳은 예루살렘 성전의 일부인 '통곡의 벽' 인근이었다.

이런 일을 하기에 '경력이 너무 출중하다'는 전임자의 의아한 충고를 뒤로 한 채 편지를 읽어내려가던 와중에 한 노인이 찾아와 편지를 써달라고 청한다. 자신은 글을 못 쓴다며, 말보다 글의 힘이 세지 않느냐며.

그 노인의 사연은 이랬다. 한 사람을 평생 증오하고 살았다고. 그랬더니 이제는 자기 자신까지 혐오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그 사연을 대신 글로 적어내려가는 일은 얼마나 참담한가. 모세 자신도 4년이란 시간을 그리 보내지 않았던가.

곤란해하던 모세가 문득 고개를 들자, 어느새 노인은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뒤다. 그를 뒤따라 우체국 밖을 서성여 보지만 노인은 온데간데 없다. 뒤이어 모세의 눈에 들어오는 건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하고 벽 틈 사이로 편지를, 쪽지를 고이 접어 넣는 사람들이다. 모세는 이후 인식의 전환을 맞는다.

이 <신에게 보내는 편지>란 15분 짜리 단편으로 63살에 데뷔했다는 이브 코헨 감독의 이력을 잠깐 볼까. 스무살에 1년간 인도 여행을 포함해 4년 동안 세계 여행을 다녔다는 감독은 이를 위해 학업도 중단했다고 한다. 또 24살부터 국제 무역에 뛰어들었던 그는 2010년 고아영화제에 인도 배경 영화 프로젝트가 선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에 뛰어들었다.

생계를 위해 사는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고 영화에 뛰어든 이 초로의 노감독은 행복하기 위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인간의, 본인의 일상이 어느 순간 참을 수 없이 가볍게 느껴졌을지 모를 일이다. 그는 연출을 공부하기 위해 잠시 예루살렘에서 이 우체국을 접했다고 한다.

본인 인생의 노정과 예루살렘에서 얻은 통찰이 <신에게 보내는 편지>의 근간이지 않았을까. 이 길지 않은 단편을 개막작으로 선정하는 과감한 선택이야말로 가톨릭영화제만의 힘일 터. 이러한 힘을 지닌 작품들을 다수 상영하는 제9회 가톨릭영화제(조직위원장 이경숙, 집행위원장 조용준)가 27일 대한극장에서 개막했다. 30일까지 열리는 올해 영화제의 주제는 '회복을 위한 동행'이다.

영화로 만나는 '회복을 위한 동행'
 

제9회 가톨릭영화제 공식 포스터. ⓒ 가톨릭영화제

 
"올해 단편경쟁에 몇 편의 작품이 출품됐는지 아시나요? 아시는 분? 총 735편이라고 합니다."

<스틸플라워> <재꽃>의 정하담 배우와 함께 사회를 맡은 김창옥 아나운서의 자문자답이 이어지자 객석에서 탄성이 흘러 나온다. 총 753편 중 작품성과 보편적 가치, 참신성 등을 고려한 15편의 단편영화가 최종 선정됐고, 3개의 섹션에 나뉘어 상영된다.

9회를 맞은 영화제의 만만치 않은 공력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단편경쟁 심사위원으로는 김형준 한맥문화 대표를 비롯해 배우 정하담과 <바람의 언덕> 박석영 감독, <오마이뉴스> 유지영 기자, 김민수 신부가 맡았다.

이렇게 가톨릭영화인협회가 주최하고 가톨릭영화제 집행위원회가 주관하는 제9회 가톨릭영화제는 단편경쟁을 포함해 15개국 50편(장편 14편, 단편 36편)의 국내외 장단편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상영한다.

개막작인 <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비롯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인 <바람의 향기>과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을 수상한 <코다>도 스크린에서 다시 만나볼 수 있다. 이를 포함해 매회 영화제 주제에 따라 국내외 최신 영화를 초청 상영하는 CaFF 초이스 섹션은 장편 12편과 초청 4편을 선보인다.

이 중 <앙리 앙리> <코다> <타인의 친절>은 각각 권칠인 감독과 조수향 배우, 윤제균 감독과 장동윤 배우, 강대규 감독과 장나라 배우가 참여한 배리어프리버전으로 상영해 의미를 더한다.

이 밖에도 4일간 풍성한 영화 만찬이 차려졌다. CaFF애니메이션 섹션은 단편 14편이 선보이고, CaFF 클래식은 '바티칸 선정 위대한 영화'로 꼽히는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마태복음>과 비토리아 데 시카 감독의 <자전거 도둑>을 상영한다. 여기에 CaFF영화아카데미와 사전제작지원프로그램까지 마련, 종합적인 영화제로의 기틀도 탄탄하다.

30일 오후 7시 단편경쟁 대상 수상작 상영과 함께 폐막하는 제9회 가톨릭영화제는 주제와 의미에 걸맞은 규모와 내실이 돋보이는 영화제라 할 만하다. 이 공동체의 회복을 꿈꾸는 풍성한 영화제에서 <신에게 쓰는 편지>와 같은 치유의 작품들과의 동행을 이뤄보시길. 모든 상영작은 선착순 무료다.  
가톨릭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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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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