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과 공황장애, PTSD 진단을 모두 받고 먹던 약. 10알이 넘는 약을 먹고도 숨을 편히 쉬지 못하고 잠들지 못했었다.
서인희
사람에 대한 공포가 심해지고 공황상태가 언제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늘어나니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평화로운 일상이었지만 때때로 이 두려움이 활력을 집어삼킬지 모른다는 또 다른 불안도 생겼습니다.
조금 움직여야겠다고 느끼던 어느 날 '사람에게 곧바로 영향을 주지 않는 일, 복잡한 관계로 얽혀야 하거나 상처를 주고받지 않는 일을 해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에서 10분이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의 음식점 주방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몸을 움직여 땀 흘리는 일을 하는 것이 오랜만이라 무척 낯설었지만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전혀 모르는 타인을 위해 정성껏 음식을 만들고 식기를 깨끗하게 닦는 일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줄여주었습니다.
약 없이도 잠을 자고 맑은 머리로 일어납니다. 매일 나에게 집중하니 숨쉬기 어려워질 상황을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필요와 기대'가 없는 사회생활이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를 아물게 할 수도 있음을 느낍니다.
완전히 소진되어 멈추었을 때 그 상태 그대로 머무르는 시간은 분명 필요합니다. 그러는 동안 다시 움직일 때 무엇을 중심에 두고 싶은지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 중심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멈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은, 보통으로 살기
죽는 순간까지 배우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배움의 과정에서 '나'를 버리거나 바꾸는 일들이 흔쾌하거나 유쾌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종종 스스로를 속이기도 하면서 지냈습니다. 나의 가치관은 틀리지 않았고 이 방향이 맞다고 믿으면서요.
굉장히 뛰어난 사람은 아니더라도 내 자리에서 조금 더 멋지고 좀 더 대단한, 혹은 영향력도 있고 변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사회에 이로운 일을 하며 타인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크고 대단한 일들 앞에서 작은 불의는 참고 넘기는 선택이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큰 변화를 위해 일상의 작은 부당함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황들이 불편했습니다. 여기에 맞고 틀림은 없습니다. 그저 개인이 무엇을 더 중요시 하느냐의 다름일 뿐입니다.
다만 그 시간을 살아보고 저는, 대단하게 멋진 일을 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바로 옆 평범한 사람들에게 만만하고 편안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도 분명 필요하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