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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피해자입니다, 명단보다 '이게' 더 우선입니다

[주장] 이태원 참사 피해자 호명하는 것만큼 중요한 진상규명... '국정조사' 미뤄지면 안 돼

등록 2022.11.15 14:39수정 2022.12.19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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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희생자 155명 명단을 공개한 <민들레> 보도 갈무리. ⓒ 민들레

 
최근 한 언론에서 10.29 참사(이태원 참사) 피해자의 명단을 공개했다. 문제는 이들이 유가족의 동의를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피해자 명단을 이런 식으로 공개하는 게 옳은지, 더 나아가서 동의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피해자의 이름을 공개하는 게 중요한지 논쟁이 일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이지만, 삼풍백화점 참사 피해자인 나는 유가족이 동의한다는 전제 하에 피해자 명단을 공개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꽃도 풀도 아니고 사람이 사람에게 깔려 죽었다. 무고한 이들이 서울의 한 골목에서 참극을 겪었다. 희생자 하나하나의 서사는 모르더라도 이름은 기억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이 어떤 꿈을 꿨는지, 어떻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살았는지 158명이라는 개별 우주에 대해서 알고 싶다.

이 같은 피해자 명단 공개를 두고 정부와 여당은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15일 중대본 회의에서 "가장 기본적인 절차인 유가족분들의 동의조차 완전히 구하지 않고 공개한 점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고, 국민의힘은 "분명한 2차 가해"이며 민주당도 공범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유가족의 동의를 받지 못했다는 부분에 대해 지적할 순 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이 어쩐지 국민들이 감정 이입을 통제하고, 국가의 책임을 덜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근조' 글자가 적힌 검은 리본마저 뒤집어 착용하라는 지침을 내리고, 희생자를 '사망자'라 부르며 분향소에 영정과 위패도 놓지 않았던 정부가 아닌가. 

또한, 명단 공개가 곧 '2차 가해'라는 여당 측의 주장은 억지스럽다고 생각한다. 10.29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합동분향소는 지난 5년 동안 정부·지자체가 설치한 참사 합동분향소 중 영정사진이나 위패가 없는 유일한 경우다. 국내의 몇몇 특이한 케이스의 예외를 제하고는 참사 피해자의 명단이 공개되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관련 기사 : 이태원 참사, 지난 5년간 영정·위패 없는 유일 사례). 그리고 유족의 동의를 받고, 피해자의 명단을 공개한 후 우려대로 2차 가해가 시작된다면, 그들을 형사 처벌하면 된다. 

시민사회의 '분열'을 가져오는 정부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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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5일 오전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을 하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이런 논란을 두고, 한편으로 마음이 저려 왔던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어쩌다 우리 이렇게 됐을까 하는 '한탄' 같은 것 말이다. 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하는 실망 말이다. 자신의 정치 성향과 신념에 반하면 상갓집 앞에서도 침을 뱉고 고인을 욕보이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 그 사실이 참으로 슬프다.

참사 초기, 정부 당국은 핼러윈 축제에 주최 측이 따로 없었다는 이유로 책임 회피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한술 더 떠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이런 희대의 망언을 남겼다. "축제라기보다는 현상에 가깝다." 과연 이게 책임자의 입에서 나올만한 말인가?


이들이 이런 태도를 보여서인지, 참사의 원인과 책임 소재를 두고 국론이 갈렸다. 일부 시민들은 '개인이 놀러 가서 죽은 걸 왜 나라가 책임져야 하냐'고 말했다. 그런데, 아무리 이들이 자발적으로 "놀러 갔다" 한들 그런 식으로 사람이 죽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참사 초기 정부의 부적절한 대응이 시민사회에 분열을 불러온다는 것을, 나는 이미 세월호를 겪으며 배웠다. 그때도 정부는 책임 회피에 연연했고 일부 국민들은 참사를 개개인의 잘못으로 돌리기 바빴다. 그후 세월호 유가족들은 지금까지 무려 8년이란 시간 동안 진상 규명을 위해 지난한 싸움을 이어오고 있다

정부의 고위 관료와 정치인들은 여전히 그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예컨대 '참사'를 '사고'라고 명명하자는 식으로) 사건을 은폐·축소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족들을 위하는 듯한 행동과 말도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유족의 동의 없는 일방적 희생자 명단 공개에 분노한다"고 말한 정진석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과거 세월호 참사 5주기에 '오늘 아침에 받은 메시지'라며 "세월호 그만 좀 우려 먹으라 하세요. 죽은 애들이 불쌍하면 정말 이러면 안되는 거죠. 이제 징글징글해요"라는 내용의 글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전력이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더 불안한 것이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지금 시점에서 명단 공개보다 우선적으로 논의돼야 할 건 '국정조사'라고 본다. 그런데 여당은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대며 국정조사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15일, 전주혜 국민의힘 의원은 기자들에게 "(국정조사 요구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향한 수사의 칼끝을 피하려는 물타기용, 방탄용"이라고 주장했다. 이 참사를 '정쟁'에 이용하는 건 누구인가. 

국내의 여러 참사가 증명했듯, 사회적 참사는 '초기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국민적 관심은 줄고 그러면 정부는 그만큼 책임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다시 세월호 참사를 예로 들어보자면, 검찰은 지난 2021년 1월 19일, 황교안 당시 법무부장관의 수사 외압 의혹 등에 대해 '무혐의'라는 결론을 내렸다. 수사 외압, 증거 조작, 구조 방치, 유족 사찰 등의 의혹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나 다름 없는 판단이었다. 

법원은 304명의 목숨을 잃은 그 끔찍한 사고의 책임을 제대로 따지지 못했다. 계약직 선장 등을 잡아넣은 후, 나머지 피의자들에게는 대부분 면죄부를 발행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다. 이런 꼴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

줄줄이 연행된 책임자들... 그래서 난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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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곤(가운데)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 장혜영(오른쪽) 정의당 원내수석부대표,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9일 '이태원 참사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요구서'를 국회 의안과에 접수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삼풍백화점의 경우는 달랐다. 당시에 나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병원에서 삼풍백화점 참사 책임자들이 수의를 입고 포승줄에 굴비처럼 엮여 줄줄이 연행되는 걸 뉴스로 봤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내 머릿속에 여전히 그들의 얼굴과 그들이 입었던 푸른 수의와 압송 차량 등이 생생하게 기억 난다.

아마도 이날 내가 이런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저들이구나. 저들이 잘못해서 무고한 이들이 죽고 다쳤구나.' 지금은 그때 내가 두 눈으로 직접 그들이 재판정에 서는 걸 봤기에, 나는 적어도 세월호 유가족처럼 머리를 밀거나 거리로 뛰쳐나와 소리치지 않고도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다들 마찬가지이겠지만, 10.29 참사 이후로 나 역시 일상에서 공포를 느낀다. 지하철 역사에 한 줄로 선 에스컬레이터에서, 사람 많은 거리에서 문득문득 두려움을 느낀다. 저 위에서 누가 의식을 잃어 쓰러지면, 또다시 참극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 10.29 참사는 이렇듯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일상의 공포를 불러왔다. 그러니 이 일은 국가적인 문제다.

그래서, 이 같은 참극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 국민적 관심이 필요하다. 그 관심을 불러모으기 위해서는 국정조사든, 유가족 동의를 받은 명단 공개든 무엇이든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 참사 피해자와 희생자들을 지우면, 이 사회에는 계속해서 삼풍백화점의 망령이 얼굴과 이름을 바꿔 나타날 것이다. 난 무엇보다 이 사실이 가장 두렵다.  
#진상규명 #이태원참사 #명단공개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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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세월호가 지겹다는 당신에게 삼풍 생존자가... "라는 게시글 하나로 글쓰기 인생을 살고 있는 [산만언니] 입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마음이 기웁니다. 재난재해 생존자에게 애정이 깊습니다. 특히 세월호에 깊은 연대의식을 느낍니다. 반려견 두 마리와 살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연재 이태원 압사 참사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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