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40대에 은퇴했더니 방송국에서... <그알>은 아닙니다

KBS 인간극장 '방금 은퇴했습니다' 촬영 후기 1편

등록 2022.12.04 11:13수정 2022.12.04 11:13
3
원고료로 응원
하고 싶은 일이 많아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은퇴를 합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떠나 있던 엄마랑 비혼 동생, 셋이 함께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씁니다[편집자말]
a

KBS 인간극장 '방금 은퇴했습니다' 방송에 나간 화면 캡처. ⓒ KBS

 
어느 정도의 손가락질은 예상했다. 힘들게 가르쳐 놨더니, 새파란 나이에 은퇴를 한다고 수근댈 것도 알았다. 벌 만큼 벌어서 배가 부른 모양이라는 빈정거림도, 딱히 신경쓰지 않고 넘어갈 부분이다.

첫 연재가 발행된 후, 세간의 반응들은 대부분 예측 가능한 범위였다. 그러나, 이 한 가지는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내 등짝을 후려치며 '너 딱 걸렸어!'를 외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KBS <인간극장>이다.


길을 걷다 20년 전에 헤어진 옛사랑을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거나, 꼬깃한 종이 한 장을 주웠더니, 10만 원짜리 자기앞 수표일 가능성. 딴생각하다가 신호대기 중인 앞차를 들이받았는데, 상대 운전자가 뒷목을 부여잡는 대신, 별거 아니라며 괜찮다고 그냥 보내주는 그런, 현실에서는 여간해서 일어나지 않는 상황. 세 동거인이 <인간극장>의 주인공이 되는 일만큼 희귀한 일이다.

<인간극장>의 주인공이 되다
 
a

인간극장 카메라. 거의 한달 가까이 우리를 따라다니며 얼려버린 동장군. ⓒ 이정혁

 
연재 첫 기사가 나간 다음 날, <인간극장> 작가로부터 쪽지가 왔다.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쓰고 나서, 방송국에서 연락이 와 몇 번 촬영에 임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엄마랑 셋이 노는 이야기가 <인간극장>의 소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대체 뭘 찍겠다는 거지? 잘한 일도 없고, 잘못한 일도 없는데. 아, 잘못했으면 <PD수첩>이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연락이 왔겠구나.

우선 함께 사는 동거인들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엄마와 동생은 당연히 반대했다. 우리가 <인간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의 취지에 부합되는가? 전국적으로 신상 다 털릴 텐데, 후폭풍을 어찌 감당하려고? 특별히 보여줄 게 없는데, 뭘 찍겠다는겨? 어쩌면, 언론사를 가장한 보이스피싱일지도 몰라, 찍는 조건으로 얼마 입금하라고 하지 않디? 심각하고 진중한 회의가 이어졌다.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온종일 카메라가 따라다니는 긴 호흡의 방송촬영은 어떤 느낌일까?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과 낯선 경험에 대한 기대 심리가 스멀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은퇴한 백수 치과의사 이야기가 도대체 왜 궁금한지, 따져 묻고 싶기도 했다. 진지하고 간절하게 지속해서 문자를 보내는 담당 작가의 진심에 흔들린 것도 사실이다. 한 번 만나보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법이니.

만나서 이야기나 해보자는 답신에, 다음 날 바로 담당 PD님(아래 PD)과 작가가 대전으로 내려왔다. 지나치게 빠른 업무 진행 스타일은 전문가이거나, 사기꾼이거나 둘 중 하나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적대적 반감을 보일 필요도 없었다. 그냥 이야기나 들어주고, 멀리서 왔으니 밥 한 끼 먹여 보내는 게 충청도 인심이라는 엄마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a

인간극장, 마라톤 촬영 전 유성 국화마라톤 참가 전 인간극장 피디님과 함께 찍은 사진 ⓒ 이정혁

 
그렇게 밖에서 점심을 먹고, 어찌하여 집에 가서 차 한 잔을 하게 된다. 두어 시간 대화를 나누고,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져, 집 근처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고, 한두 잔 술이 넘어갈 때, 우리는 이미 <인간극장>의 출연진으로 확정이 되어 있었다. 뭐, 그렇다고 술기운 탓은 아니다. 인상 좋은 PD의 편안한 말투와 진정성 있는 설득에 세 동거인이 넘어갔다고나 할까.


그럼 촬영은 언제부터 시작하나요? 내일부터 당장 찍죠. 제아무리 단김에 쇳불을 뺀다지만, 마음의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3일 후로 촬영 시작일을 잡았다. 미장원에 다녀오고, 대청소하고,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폭탄 돌리기 게임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날이 찾아왔다. 화장실 갈 때 빼곤 카메라가 항시 따라붙는, 트루먼 쇼의 시작이었다.

리얼리티를 표방하는 <인간극장>은 진짜 대본이라는 것이 없다. 그럼 이제부터 저희는 뭘 해야 하죠? 원래 하시려던 일을 편하게 하시면 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사는 모습을 담아내는 거니까, 긴장하지 마시고, 편하게, 편하게. 카메라가 켜지면 우리는 아주 편한 표정으로 얼어붙었다.

평소에는 대화를 많이 나누던 식사 시간마저 빙하기로 변했다. 식사 장면 촬영이 끝나면, 모두 소화제를 한 알씩 삼켰다. 카메라가 아니라, 내장 기관까지 얼려버리는 동장군이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이다. 피디의 말은 한결같았다. 처음에는 어색한데, 찍다 보면 하루하루 다르게 적응됩니다. 즉흥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질문 앞에서 머릿속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설원으로 바뀌었다.

한 달간의 트루먼쇼
 
a

옛 직원들과 함께 촬영한 인간극장 옛직원들과 한달 만에 만나서 술잔을 기울인다. ⓒ 이정혁

 
그렇게 배추밭에 다녀오고, 핑크뮬리를 보러 갔고, 캠핑에 다녀왔다. 그리고 머리 위에 드론을 달고 10km 건강 마라톤을 달렸다. 완주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던 인간승리의 레이스였다. 카메라와 아이들이 없었다면, 분명 중간에 포기했을 것이다.

촬영이 며칠 진행되자, 엄마와 동생은 적응이 아닌,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온종일 따라다닌다고 생각해보라. 그것도 한 손에 카메라를 들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아내면서. 카메라 앞과 뒤, 두 개의 인격으로 자아 분열이 일어나게 된다. 내가 저지른 일에 죄 없는 가족들을 희생시키는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현명한 선택이 필요했다. 엄마랑 놀기 프로젝트를 잠시 접고,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엄마와 동생의 촬영 분량을 줄이고, 앞으로의 계획도 구상할 겸. 강원도 속초로 떠나는 날, 엄마는 손을 흔들며 내게 말했다. 최대한 천천히 와. 좋으면 한 달 쉬었다 오든가(여행 길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길 위에서 배운 인생에 관하여는 다음 편에 소개할 예정이다).
 
a

인간극장 '방금 은퇴했습니다' 방송화면 캡처. ⓒ KBS

 
이 글이 발행될 시간이면, <인간극장> 방영은 종료되었을 것이다. 위에서는 푸념에 가까운 이야기를 적었지만, 나름 재미있었고, 기억에 남을 만한 경험이었다. 엄마는 마지막 촬영을 하고 난 후,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좀 더 자연스럽게, 재미있게 찍었더라면. 그런 엄마에게 시즌2를 준비하라고 했다가 밥주걱으로 맞을 뻔하긴 했지만 말이다.

끝까지 촬영을 거부하던 아내도, 마지막 김장 촬영하는 날에는 순순히(?)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김장하던 날, 김치와 김칫소가 조화롭게 버무려지듯, 우리는 촬영 기간의 서운하거나 힘들었던 감정을 털어내고 다시 한 가족이 되었다. 거의 한 달 가까이 함께 고생한 피디님과도 말이다. 이제는 형, 동생 하며 친하게 지내는 사이다.

- 2편에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기사는 발행 후 개인블로그인 https://blog.naver.com/irondownbros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인간극장 #방금은퇴했습니다 #엄마랑놀기프로젝트 #인간극장후기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그래서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대자보가 대학가에 나붙고 있다
  3. 3 [단독] 김건희 일가 부동산 재산만 '최소' 253억4873만 원
  4. 4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5. 5 [동작을] '이재명' 옆에 선 류삼영 - '윤석열·한동훈' 가린 나경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