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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때 조용히 지내줘 고맙다며 표창장 준 경찰

[납북귀환어부 이야기] 승운호 선원 전태관씨

등록 2022.12.29 10:51수정 2022.12.29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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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관씨가 일하고 있는 현장. 그는 여전히 건설현장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 변상철


전태관씨를 만난 곳은 서울의 한 공사 현장이었다. 그는 납북되었다 돌아온 뒤 고향을 떠나 건설 현장을 떠돌며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일하고 있는 곳은 서울의 한 복지시설 건설 현장이었는데, 현장 근처의 카페에서 잠시 시간을 내 인터뷰를 진행했다.

전태관(1954년생)씨가 태어난 곳은 울산광역시 방어진이다. 그러나 4살 때 강원도 고성 아야진으로 이사 왔기 때문에 고향 울산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다고 한다. 전씨의 형제는 모두 6남매였다. 먹여 살려야 할 식구들은 많았지만, 아버지의 돈벌이는 여의찮았기에 전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학업을 그만두고 배를 타야 했다.

당시 가정형편은 매우 어려워, 일주일 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 굶기도 하고, 때때로 허기에 쓰러지기도 할 정도의 상황이었다고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농사도 몇 년간 흉작이 계속되어 식량도 구경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그렇게 가난한 살림에도 전씨의 키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훌쩍 자라게 되었다.

전씨가 13살이 되던 해에 그의 신장은 172cm로 성인과 맞먹는 덩치였기에 뱃일하는 데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어린 마음에 뱃일하는 것을 누구에게라도 들키고 싶지 않아, 마을 사람들과 마주칠 수 있는 아야진이 아닌 속초로 나가 배를 탔다고 한다.
 
"승운호는 납북되던 그때 처음 탔어요. 난 원래 속초에서 오징어 배를 주로 탔는데 그날은 친구 손○○이 하고 같이 아야진에서 출발하는 승운호를 타려고 갔어요. 그런데 승운호는 이미 인원이 다 차고 한 명 자리만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하고 손○○이가 싸웠고, 결국 손○○이 배에서 내리고, 나 혼자 승운호를 타고 오징어잡이 가게 된 것이죠. 그때 내가 그 배를 안 탔으면 친구 손○○이가 잡혀갔겠죠. 운명의 장난이죠."

승운호가 울릉도 공해상으로 조업 나간 첫날은 날씨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승운호는 장기간 오징어 조업을 위해 물과 식량, 얼음을 잔뜩 싣고 나갔다. 물론 전씨는 조업한 장소가 정확히 어디였는지 알지 못했지만, 울릉도 방향으로 10시간 이상 운행해 이동했던 것은 확실하다고 했다.

밤새 조업하고 또다시 움직이며 조업했다고 했다. 한밤중에 조업이 끝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선장의 지시에, 전씨는 선실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고 한다. 아침녘에 밖에서 들리는 소란한 소리에 잠이 깬 전씨는 선실을 나왔다고 한다.

밖은 안개로 자욱한 날씨였는데, 그 짙은 안개 속을 가르며 쾌속정 2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쏜살같이 달려온 쾌속정은 곧바로 승운호 곁에 붙었고, 이윽고 총소리가 들렸다. 총소리에 놀란 선원들은 겁을 잔뜩 집어먹고 전부 갑판으로 나와 모였고, 선장과 기관장만이 선실 쪽에 남아있게 되었다.

귀환시켜 달라고 몸싸움하기도


월남전에 다녀왔던 승운호 선원 조○○씨가 함대의 깃발을 보더니 '저건 북한기다'라고 외쳤다. 그 순간, 선원들은 모두 '죽었다'라는 생각에 덜덜 떨었다고 한다. 그때 나이 든 선원들과 형들이, 어린 선원들에게 정신 바짝 차리라며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말도 어린 전씨의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지는 못했다.
 
"북한군에게 잡혔으니 이제 죽었다 생각만 들었죠. 바다에 표시가 없으니 우리가 잡힌 곳이 어디가 어딘지 어떻게 알겠어요. 비가 와서 북한으로 끌려가는 동안 갑판에 서 있어서 옷이 모두 젖었어요. 그렇게 북한에 도착하니 아침이 되더라고요."

납북 직후 옷을 갈아입게 하고 곧장 식사를 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 든 선원들은 숟가락을 집는 어린 선원들에게 '밥에 독이라도 탔을지 모르니까 지금은 먹지 말라'고 주의를 주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 사람들이 먼저 밥을 먹어 식사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밥을 먹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이틀 정도 머문 뒤 금강산휴양소로 이동해 한두 달 정도 머물렀다고 한다. 그곳에서 북한 사람들로부터 여러 번 조사를 받았는데, 조사내용은 주로 아야진 지도를 그리는 일로 야야진의 관공서 위치, 그리고 청간에 있는 특수부대 위치 등이었다고 한다. 전씨가 기억하지 못해 그리지 못하는 관공서 위치는 오히려 조사하던 북한 사람이 알려줄 정도로 북한은 이미 남한의 정보를 꿰뚫고 있었다고 한다.
 
"이미 북한 사람들이 고향 지리를 다 알고 있더라고. 거짓말하는지 안 하는지 다 알면서 그렇게 조사를 하더라고요. 심지어는 우리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다 알 정도였어요. 나를 조사하던 북한 사람이 '동무 동네에 사는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젓가락이 몇 개인지 까지 다 알고 있으니 똑바로 말하라'고 하면서 겁을 주더라고요."

금강산에서 한두 달 머문 뒤 해주를 거쳐 평양 근처 석암휴양소로 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한국으로 귀환할 때까지 10여 개월을 지내야 했다고 한다. 석암휴양소에 있는 동안 남한 어선이 일주일에 한 척씩 잡혀 들어온 것 같다고 한다. 나중에 승운호 뿐만 아니라 다른 배 선원들까지 지내게 되면서 그곳에 수용된 남한 선원들은 150여 명 넘는 인원이 되었다고 한다.

납치된 선원들은 그곳에서 관광지나 유명 시설 견학을 다녀오거나, 운동, 공연 등을 관람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휴양소 생활은 특별히 어렵지 않았으나, 단지 유일하게 힘들었던 것은 언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는 막막함이었다고 한다.

억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선원들의 항의가 심해졌고, 심할 때는 귀환시켜 달라며 북한 사람들과 몸싸움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특히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이 들린 뒤로는 더욱 고향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져 북한 사람들과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고 한다.
 
"납북된 지 13개월이 되던 때에 우리를 버스에 태우더니 원산으로 가더라고요. 원산항에 우리 승운호가 정박해 있더라고요.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승운호를 타고 남한으로 내려왔죠. 그날이 72년 9월 7일이었어요. 그때 여러 배가 같이 내려왔어요. 그중 남해 쪽에서 온 탁성호라는 배도 있었어요. 귀환하던 그날 파도가 심해 바닷속 바위가 보일 정도로 심한 파도가 쳤어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이유 없이 수사기관에 연행되기도

속초항으로 들어온 전씨는 다른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곧바로 버스에 태워져 속초시청 2층으로 옮겨졌다. 며칠 후부터 시청 건너편 해동여인숙이라는 곳에서 조사를 받았다. 수사관이 호명하면 여인숙으로 이동했고, 여인숙 방에 들어가면 수사관 5명 정도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서너 평 정도 크기의 여인숙 방에는 책상이나 의자 같은 집기류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단지 수사관 한 명이 노트 한 권을 들고 전씨의 진술 내용을 적었다고 한다.

전씨를 가장 불안하게 했던 것은 여인숙에 들어서자마자 들리는 비명이었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나 죽는다, 죽는다'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전씨 역시 길이가 80~90cm 길이의 장작을 오금 사이에 끼우고 허벅지를 밟는 고문을 시작으로 수사관 5명이 기절할 때까지 구타를 하는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한다.

여러 명이 다리와 팔을 잡고 가슴에 올라타 물을 붓기도 하고, 전기선 집게를 양손에 걸고 군용전화기를 돌리며 전기고문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전씨는 수사관들에게 제발 죽여 달라고 울부짖기까지 했다고 한다.
 
"장작으로 수시로 엉덩이를 때려서 엉덩이 피가 다 텨졌어요. 얼마나 맞았는지 나중에 고문이 끝나고 나서 시청으로 돌아가려고 일어나니까 다리가 안 움직여요. 신경이 다 죽은 것 같았어요. 그렇게 걷지 못하고 있으니까 수사관 두 명이 양쪽 어깨를 하나씩 메고 질질 끌고 시청으로 가더라고요. 거기서 하루 이틀 몸이 좀 풀린다 하면 다시 여인숙으로 데리고 가서 똑같이 고문을 해요."

북한에서 머무는 동안 지령받은 것을 자백하라는 것이 고문의 이유였다. 전씨도 답답했지만 수사관들 역시 초조해했다고 한다. 결국 수사관들과 전씨는 북한 사람들과 접촉하기로 했다는 장소를 지어냈다고 한다. 그렇게 수사관과 입을 맞춰 허위자백을 하고 나서야 고문의 시간은 끝났다고 한다. 형식적인 검찰 조사를 받고, 형식적인 재판을 통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고 풀려난 전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군에 입대했다.

군 생활을 하던 중 어느 날 소대장의 지시로 안보 교육을 실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북한에 다녀왔으니 북한 이야기를 하라고 해 싫다고 거부하자 얼차려를 당해야 했다고 한다. 그래도 전씨는 수백 명의 사람 앞에서 북한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느니 차라리 얼차려가 마음 편했다고 한다.

전씨는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더 이상 바다를 보며 배를 타기 싫었다고 한다. 늘 경찰이 집 주변이나 친구 주변을 맴돌며 감시했다. 결국 청간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 공사장을 전전하며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이라고 해서 경찰의 감시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이유도 없이 수사기관에 연행되기도 했다. 1980년대 초 롯데월드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그는 퇴근 무렵 갑작스럽게 닥친 수사관들에게 연행되었다. 안대로 눈이 가린 채 그가 도착한 곳은 어느 지하실이었다.
 
"지하에 어느 작은 방으로 들어갔는데 안대를 풀고 보니, 물 배수되라고 설치해 놓은 트렌치(바닥을 파서 설치한 도랑 모양의 콘크리트 구조물)도 있더라고요. 수사관이 그 트렌치를 가리키면서 '여기 피비린내 나는 거 봐라. 너 하나 죽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하는데 정말 피비린내 나더군요. 그리고는 저를 홀딱 벗기더니 통닭구이를 시키더라고요. 그리고 때리고 물고문하고 했어요. 고문할 때마다 저에게 북에서 지령받은 걸 무조건 대라는 거예요. 의자에 묶고는 전기고문을 하는데 예전에 속초에서 전기고문 받던 기계하고 똑같더라고요. 그렇게 2~3일 조사하다 아무것도 안 나오니까 풀어주더라고요. 서울역에 내려주면서 명함을 주는데 그냥 찢어버렸어요."

이태원의 한 호텔 변전실에서 근무할 때는 호텔 회장이 용산경찰서에 신원보증 각서를 쓰기까지 했다고 한다. 당시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기간으로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실제 올림픽이 끝나자 용산경찰서에서 별다른 이유 없이 전씨에게 표창장을 수여했다고 한다. 아마도 전씨가 올림픽 기간 동안 아무런 사고 없이 조용히 지내줘서 고맙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내가 전태일 기념관 공사에도 참여했었어요. 하루는 통신공사를 하러 가보니 전태일 기념관 공사더라고요. 전태일이라는 사람이 열사잖아요. 그걸 보니 공안기관에서의 조사라는 것이 엄청 아픈 눈물 나게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공사할 때 그곳을 드나들 때마다 마음이 굉장히 무거웠어요. 우리는 진짜 억울하잖아요. 어린 나이에 먹고 살기 위해 바다에 나갔는데 납북되었다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피눈물 나는 역사를 써야 하니.... 이런 고통과 기억은 없어지지 않잖아요. 누구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이 억울함을 빨리 풀어줬으면 좋겠어요."
#평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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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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