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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드리치-호날두의 '월드컵 메시지', 다른 게 보였다

[나의 월드컵] 축구 싫어하던 어린이, 월드컵에 울고 웃다

22.12.14 10:55최종업데이트22.12.14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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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로코전 승부차기 보다가 눈물 흘리는 스페인 어린이 축구팬 한 스페인 어린이 축구 팬이 6일(현지시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대형 스크린을 통해 2022 카타르 월드컵 16강 모로코전 승부차기를 지켜보다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양팀은 이날 연장전까지 0-0으로 비기는 혈투를 펼쳤지만, 승부차기에서 모로코가 스페인을 3-0으로 꺾었다. ⓒ 로이터/연합뉴스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둔 2002년 5월 26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프랑스와의 평가전이 열렸다. 지네딘 지단, 티에리 앙리, 릴리앙 튀랑 등 슈퍼스타들이 즐비한 디펜딩 챔피언과의 승부였지만, 대한민국은 팽팽한 승부 끝에 2대 3으로 패배했다. 경기가 끝난 다음 날, 당시 열 살이었던 내게 같은 반 키다리 친구는 이렇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야, 프랑스랑 붙어서 3대 2로 진 건 진짜 잘한 거야."

그러자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래? 나는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 어린 시절의 나는 이상하게 축구에 관심이 없었다. 유독 운동 신경은 젬병이었다. 공을 발에 맞추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못 하는 것일수록 재미가 붙지 않았다. 또래 남자아이들이 운동장에 나가 축구를 하고 있을 때, 책을 읽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런 나에게도 2002 한일 월드컵은 나름의 각인을 남겼다. 동시대 사람들처럼 애국심에 불타올랐던 아버지가 '오늘 폴란드전 안 보고 자면 혼난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어쩔 수 없이 TV 앞에 앉아야 한다.

어쩔 수 없이 경기를 보고 있던 나에게도 고 유상철 감독의 중거리 골은 놀라웠다. 붉은 악마의 환호도 놀라웠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한꺼번에 환호하고 춤추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모두가 축구로 하나가 되었던 시절이다. 아파트 단지 중앙 놀이터 앞에 TV를 설치해 단체 응원을 장려했던 것도 떠오른다. 월드컵 폐막일 다음 날인 7월 1일(월요일)이 임시 공휴일로 지정된 것도 생생한 기억이다. 어느새 나도 그 분위기에 합류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일기장 끄트머리에 '꿈☆은 이루어진다'라고 적어놓은 것을 보면.

월드컵을 온전히 즐긴 것은 아니지만, 코요태의 김종민이 2004년생 아이돌인 장원영에게 '2002 월드컵 못 봤죠? 엄청 재밌었는데!'라고 으스대는 이유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의 말대로 '엄청 재미있는' 시절이었다.

무관심했던 축구가 좋아진 이유

하지만 2002 월드컵 때까지만 해도 축구에 대해 큰 감흥은 없었다. MBC에서 <이경규가 간다>를 계속 방영해주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나는 연예인들이 나와 퀴즈를 푸는 <브레인 서바이버>가 더 좋았다. 아마 본격적으로 축구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열여덟 살이었던 2010 남아공 월드컵이다.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는 '양박쌍용(박지성, 박주영, 이청용, 기성용)'을 비롯해 탄탄한 멤버들이 있었다. 부부젤라 소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나는 부부젤라 소리를 이상하게 좋아했다. 부부젤라 특유의 불온한 음파가 오히려 긴장감을 더 해 주는 듯하다.

원정 첫 16강을 이뤄낸 대표팀만큼이나 나에게 감동을 준 것은 우루과이의 전설적인 공격수 디에고 포를란이었다. 당시 월드컵의 공인구로 쓰였던 '자블라니'는 선수들 사이에서 다루기 힘든 공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포를란은 개의치 않고 경이로운 골을 넣었다. 특히 그가 독일과의 경기에서 터뜨린 발리 골은 나를 축구의 세계로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그의 커리어는 남아공 월드컵 이후 가파른 하강 곡선을 그렸지만, 그는 나의 첫 번째 월드컵 스타였다. 남아공 월드컵이 막을 내린 이후,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엘 클라시코'도, 축구로 전쟁을 멈춘 디디에 드로바도 알게 되었다.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 이후 최고의 활약을 펼쳤던 2010/2011 시즌을 중계로 보았던 것도 자랑이라면 자랑이다.

공 뒤에 있는 인간을 보다
 

▲ 준결승전 후 악수하는 아르헨 메시와 크로아티아 모드리치 아르헨티나 축구대표팀의 주장 리오넬 메시(가운데 왼쪽)와 크로아티아 축구대표팀 주장 루카 모드리치(가운데 오른쪽)가 13일(현지시간) 카타르 루사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준결승전 종료 후 악수하고 있다. 이날 아르헨티나는 크로아티아에 3-0 완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다. ⓒ 신화 / 연합뉴스

 
그리고 다시 십여 년이 지났다. 하루하루가 축제 같았던 2022 카타르 월드컵도 어느새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번 월드컵은 내가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월드컵보다 재미있다. 이변의 서사가 속출했다. 전통적인 강호들이 참패했고, 모로코의 4강 진출 같은 이변이 벌어졌다. 전술적으로도 수준 높은 경기들이 이어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멋진 경기 뿐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사람들에 관심이 간다. 크로아티아의 주장 루카 모드리치는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뛰며 팀에 공헌하고, 경기장 뒤에서는 어린 선수들에게 상담사가 되어 주며, 눈을 맞춘다. 반면 다섯 번의 발롱도르를 수상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포르투갈의 탈락이 확정되자마자, 동료를 뒤로 하고 홀로 울면서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동갑내기 슈퍼스타(1985년생)의 대비를 보면서, 진정한 리더의 의미를 생각한다.

비현실적인 실력 때문에 좋아하지 않았던(?) 리오넬 메시의 '라스트 댄스'가 성공적이길 바라는 마음도 생겼다. 포르투갈전 역전승 이후 마스크를 집어 던지면서 오열하는 손흥민을 보며 따라 운 것도 같은 이유에 있다. 한 인간이 짊어지는 무게를 조금이나마 가늠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4년 4개월간의 임무를 마치고 고국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벤투 감독은 카타르 월드컵 조별 예선 가나전 패배 이후 '축구는 인생을 닮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말처럼, 인생은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 알 수 없다. 축구를 싫어하던 어린 시절 보았던 월드컵, 그리고 축구 덕후가 된 지금의 월드컵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 역시 그렇다.

나의 30대에는 아직 두 차례의 월드컵이 남아 있다. 2026 월드컵, 2030 월드컵은 나에게 어떤 의미로 간직될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슛돌이' 이강인이 월드컵 무대를 활보할 것이라 상상할 수 없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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